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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시135:1-21)

by 권또또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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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는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기우뚱 기우뚱, 빙빙빙, 그렇게 넘어지기도 하고, 돌기도 하고, 또 갈팡질팡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완전히 자빠지지는 않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 같지만, 다시금 오뚝오뚝 일어섭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묵직한 무게중심이 그 오뚝이를 매번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무게중심을 지닌 사람도 그와 똑같습니다.

그렇죠. 우리기 신앙 생활하는 여정 가운데 왜 흔들림이 없고, 왜 넘어짐이 없고, 왜 쓰러짐이 없겠습니까? 신앙의 삶 가운데 승리만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의심도 있고, 절망도 있고, 한숨과 신음도 있고, 탄식과 눈물도 있고, 괴로움과 고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묵직한 무게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신앙의 무게 중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시편 135편이 그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5편은 찬양시입니다. 본문 1절에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그렇게 시작한 시는 19절에서 이스라엘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리고 마지막 21절을 통해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만큼 본문의 시편은 “여러분, 찬송합시다. 할렐루야! 찬송합시다.”하는 벅찬 고백과 감격의 찬송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벅찬 고백과 감격의 찬송시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과 실상은 그렇게 감격의 찬송이 터져나오지 않을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비루하고 속이 썩는 것 같은 고달픈 현실이 더 많습니다. 때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속상함과 분노가 솟구쳐 나오기도 합니다. 걱정과 염려, 불안과 초조,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만한 답을 찾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과연 그런 상황에 앞에서 어떻게 “여러분, 찬송합시다. 할렐루야! 찬송합시다.”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그 상황과 현실 가운데서 어떻게 태연하게 ‘찬송합시다.’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탄식과 울분을 참아내는 것만으로도 그저 기특할 뿐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분들이나 개인기도를 하면서 흐느껴 우는 분들을 가끔 볼 때가 있습니다. 어두움이 짙게 깔린 예배당에서, 아무 소리 없는 그 적막한 가운데, 그토록 아파하며 슬퍼하면서, 주님 앞에 토설하는 분들이 있죠. 그런 분들에게 가서 “할렐루야. 찬송합시다. 할렐루야. 찬송합시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할렐루야, 찬송합시다.’하는 말이 단순한 공기의 진동,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오늘 시편 135편을 기록한 시편 기자는 늘 그렇게 벅찬 일들이 펼쳐졌기 때문에, 자신의 뜻과 바람대로 늘 형통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찬송하자고, 그렇게 벅찬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편기자도 역시, 나름대로의 고단함과 처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찬양을 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신앙의 묵직한 무게 중심 때문입니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찬양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그 묵직한 무게중심은 곧 ‘출애굽 사건'의 대역사를 펼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무게중심입니다. 본문의 8-12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행한 표적들과 징조들을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보내셨도다 그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

하나님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던 그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애굽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그 표적과 능력을 펼치신 그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과 그 신하들을 무릎꿇게 만드셨던 그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가는 그 여정 가운데서도 그 수많은 나라들과 강한 왕들을 꺾으셨던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래서 ‘자격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을 주신 그 하나님’ 때문에, 내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금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견고하고 묵직한 신앙의 무게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 가운데 실패로 얼룩지고, 아픔으로 허덕일 때에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 때문에 어떤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킬 수 있는 것이죠.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 곧 10가지 계명들을 지킬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까닭에 말입니다. 그 고백이 출애굽기 20장 2절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400년간 종살이 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그 은혜만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할렐루야, 찬송합시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내가 어떤 형편 속에 있어도,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릴 때 자연스런 찬양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상황을 응시해 볼 때 과연 내 입술에서 저절로 찬송의 노래가 터져 나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찬양보다는 신음이 먼저, 노래보다 탄식이 우선 터져나올 수 있습니다. 감히 ‘할렐루야’라고 입이 떨어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저 ‘주님, 주님’하고 탄식의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더욱 거칠게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신앙의 묵직한 무게중심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나 자신, 마귀와 사탄의 노예로 살던 나 자신, 어둠의 자녀 속에 살던 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해 주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해방시켜 주신 그 은혜만 떠올려도, 내 속에서 ‘할렐루야’하는 찬송이 터져 나올 수 있는 것 말입니다. 그 구원의 은총과 감격이 우리로 하여금 묵직한 신앙의 무게중심을 다시금 회복하게 해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환경속에 처할지라도, 우리 신앙의 무게중심을 늘 잃지 않게 하는 고백들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7:2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이, 우리를 오뚝이처럼 다시금 일으키게 하는 신앙의 무게중심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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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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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오늘 아침에, 내 속에서 탄식이 적당하고 마땅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으로 인해 ‘할렐루야’라고 입을 벌려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찬양할만한 상황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에 대해 감사의 고백이 터져나올 수 있는 오뚝이와 같은 신앙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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