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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시온에게 네게 복을(시134:1-3)

by 권또또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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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5편 중 마지막 시이며, 대화체로 씌여져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절기 때 성전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순례자들이 날이 밝기 전에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을 지키며 봉사하는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촉구합니다. 그러면 성전 안에 있던 레위 지파 사람들이 그에 대한 축복으로 화답을 하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성막은 물론이요, 성전에서도 그러한데, 낮 시간대 뿐만 아니라 밤 시간대에도 제사장들의 봉사는 이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제단의 불을 새로 갈기도 하고, 등에 기름을 채워 불을 밝히기도 하고, 그리고 수금과 비파와 현악의 악기담당자를 비롯해 찬양을 담당하는 레위인들, 그리고 불순한 세력들의 침입과 약탈로부터 성전문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밤시간 동안 성전을 섬겼던 제사장들을 위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성전의 출입문은 물론 성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 레위인들의 모습을 보고 성전 순례자들이 축복을 하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내려달라고, 강복해 달라고 간구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1절의 ‘모든 종들아’라고 표현된 ‘종’은 히브리어 ‘에베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본래 ‘아바드’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아바드’란 곧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이른바 영어의 ‘service’라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즉 ‘섬기다’는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모든 종들아’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성전에서 시중드는 레위인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실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칭하는 말입니다. 그만큼 시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할 일이 바로 ‘여호와를 송축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2절에서도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강조합니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기에서 손을 드는 행위는 믿음과 결단에서 나온 의지의 표현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르비딤에서 아말렉과의 싸움이 났을 때 여호수아와 군사들을 싸움터로 보내고, 자신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믿음의 손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그때 그의 손이 지쳐 내려오면 아말렉 군사가 이기고, 대신에 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에 군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지치지 않도록 장로들이 붙들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 교회를 세우는 일은 담임목회자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이들, 밑가지와 같은 이들이 함께 받들 때에만 교회가 바르게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손을 계속 들고 있을 때, 마침내 그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고백한 게 무엇입니까? “여호와가 대대로 아말렉과 더불어 싸우실 것이라.”하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내가 내 손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내가 기둥과도 같은 이들, 밑가지가 되기를 자처하는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승리하게 하실 것이란, 그런 의미가 있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송축할 때 의심으로 하거나 억지로 찬양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고백과 찬양보다는 진정한 믿음과 결단에서 나오는 진실함으로 송축해야 하죠. 때로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마음에는 여전한 의심과 걱정과 두려움을 지닌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설령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그런 믿음의 자세를 견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화답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말입니다. 본문 3절에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도, 방해할 수 없는 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향해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존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복을 빌어드리는 귀한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의 일터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 누구가 되었든,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은총의 복을 빌어드려야 하죠. 설령 원수와 같은 사람,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억압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는 것처럼, 그들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더욱더 평강과 은총의 복을 빌어드려야 합니다. 그때 그 빈 평안과 은총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의 평가와 은총이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않다면, 그 빈 평안과 은총의 복이 내게 임할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빈 평안과 은총이 입술의 언어로만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말로 ‘아바드’하는 것처럼, 다시 말해 ‘service’하는 것처럼, ‘섬기는 자세’를 갖추는 마음과 모습으로 평안과 은총을 비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야 마음이 통하고, 통하면, 변하게 돼 있고, 변하면 오래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에 어떤 공동체이든지 좀 더 아름답고 바르게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본문 3절에서 가리키는 ‘시온’은 곧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더욱이 이 시온이 ‘시오니즘’을 대변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본래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으로, 그 꼭대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지만, 오랫동안 전쟁과 종교 분쟁으로 많은 시련과 아픔을 가진 곳이기도 하죠.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여부스 족을 몰아내고 시온 산위에 다윗 성을 세우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 곧 자신들을 지칭하는 시적인 명칭이 되었고, 그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와 로마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에는, 넓은 의미로 그들이 잃어버린 조국의 땅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훗날 시온주의로 발전하여 그들의 신앙과 조국 땅의 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현재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건국하게 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한 후, 1948년 5월 14일 그야말로 근 2000년의 세월 동안 나라 없이 흩어져 살다가 이스라엘의 독립국을 다시금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시온주의 민족독립운동 속에서 그 일을 끝까지 추구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면서, 이면적 유대인은 우리 자신들은 무엇을 내다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실은 제 본향을 그리며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영적인 본향인 천국을 말이죠. 그래서 그 나라에 안착하기까지, 이 땅에서 수고와 눈물고 괴로움의 날들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 날을 고대하면서, 어떤 역경도 이겨내며 살아가는 자세, 그것이 영적인 시온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오늘 여기 이 땅, 힘들고 괴로움 속에서도 오직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아바드’ 곧 ‘섬기는 자세’를 갖추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마음과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자들, 천국본향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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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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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런 마음과 자세로, 내가 아는 분들에게 주님의 복을 빌어주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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