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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시137:1-9)

by 권또또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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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왕국으로 분열되었던 이스라엘은 북왕국이 B.C. 722년 앗수르 제국에 의해, 남왕국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했고, 성전 기물들까지 약탈해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지도 세력들과 유능한 청년들까지 다 포로로 끌고갔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그런 격이었죠.

그렇기에 그 비참한 실상을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한다고 해도, 결코 그것은 유다 민족으로는 치욕적인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자국의 군대가 멸망당하고, 성전이 불타고, 전쟁과 상관없던 일반 백성들까지 포로로 끌려갔으니, 그 처참한 상황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읽은 시편 137편도 그런 처참한 예루살렘의 상황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레위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가 바벨론의 유프라테스나 티그리스 강변에 끌려간 상황에서, 고국의 성전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부른 노래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독립투사들이 만주 땅에서 불렀던 애국가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만큼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이방 땅의 한 강변에 서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시편의 분위기는 우리를 구슬프게 하지 않겠습니까?

보통 시편에 등장하는 시온의 노래들은 기쁨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온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 속에서 그 어떤 대적들이 침략해 와도 하나님께서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시편 46편 5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또 시편 48편 1-2절에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하고 시온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온산은 그곳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입니다. 그곳이 우주의 중앙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상징성이자 희망 자체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은 시온성과 멀리 떨어져 살아도 하루에 세 번씩 그곳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그 습관은 바벨론에 끌려가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시편 137편은 동일하게 시온을 노래하는 시편이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처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나 돌보심이나 은혜로우심보다는,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완전히 폐허더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바벨론의 강변에서 이 시를 읊조리는 시인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기 때문이죠. 무너진 시온성, 곧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리고, 성전 기물들까지 다 약탈당했다면, 그것은 곧 미래도 불투명한 것이고,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참한 노래를 부르는 본문의 시편기자는 물론이고, 포로로 끌려가는 유대 민족들을 더욱더 아프게 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바벨론 사람들이 과거에 즐겨 부르던 시온의 노래를 다시금 자랑스럽게 불러보라는 조롱 섞인 말을 늘어 놓는 것입니다. 그 말이 지배국인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말놀이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포로로 끌려가는 유대 민족들에게는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시온의 노래를 즐겨하던 시편 기자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겠노라며, 울면서,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버립니다. 본문 2절 말씀에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편기자가 흘리는 눈물은 우리에게 결코 생소한 눈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눈물을 빼고 설명한다면 쉽게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시편 56편 8절에서도 그런 고백을 하죠.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 116편 8절에서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눈을 눈물에서 건져달라고 호소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구원해 달라는 간청이죠.

그렇듯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때로는 고통스러운 모습이기도 하지만, 실은 눈물을 통해 회복의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복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의 시편기자 역시 시온성 곧 예루살렘 성전과 많아 떨어진 바벨론의 강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성물이 약탈당하고, 자국민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에 처해 있는데,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의 시편 기자도, 그리고 대다수의 유대 민족들은 그 눈물 가운데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심, 바꿔 말해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는 내 팽개친 채, 자기 좋은 길만을 좇아 살아왔던 그 삶을 참회하며, 통회 자복하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그 강변에서 흘리던 눈물은 오히려 다시금 하나님을 붙잡는 계기가 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효자가 되고, 대한민국 사람은 이민을 가야 애국자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나라를 잃고, 성전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실은 하나님 앞에 효자요, 애국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눈물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1절을 통해 고백하는 눈물은 정말로 가치 있는 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본문의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치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데 대한 회개의 눈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눈물을 통해, 본문의 시편 기자는 다시금 예루살렘을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을 다짐합니다. 본문 5-6절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무엇을 깨닫게 하는 고백입니까? 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은 마치 시편 126편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이 쓰라린 패배와 포로로 끌려가는 눈물을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을 통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예루살렘을 잊지 말아 달라고,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한 이방 족속들을 다 허물어뜨려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도록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호소한다 한들, 하나님께서 곧바로 그 마음을 바꾸셨습니까? 그렇지 않죠. 이때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70년이 다 찼을 대,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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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북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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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우리 인생에서도 이런 고난과 어려움은 숱하게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다면,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내 형편과 환경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하시는 은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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