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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시138:1-8)

by 권또또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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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표제는 ‘다윗의 시’로 돼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썼다는 뜻이죠. 다윗은 이 시를 통해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은 과거에 베푸신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현재도 마찬가지죠, 미래에도 똑같습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동일하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은 지나간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찬양하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내가 여러 신들 앞에 주님께 감사하는 이유, 다윗이 여러 신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전을 향해 예배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모든 이름보다도 더 높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없었던들, 내가 온전히 예배할 수도, 찬양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긍휼 아니겠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낳아 품는 모습입니다. 낭떠러지 절벽에 자리잡은 매 둥지에 새끼 매들을 품고 있는 어미 매의 모습도 그와 같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삶을 8년 넘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마다 숨가프게 도망쳐 다녔고, 심지어 이방 땅 블레셋의 땅에 도망가서 미친 척을 하며 목숨을 부지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 유대 광야 지역을 전전긍긍하며 도망쳐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사울의 칼날에 죽지 않았고, 사울의 최정예부대에 붙잡히지 않았는가? 이유는 한 가지 뿐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주님의 긍휼로 다윗을 지켜주고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 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품어주셨기 때문에 다윗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모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실은 주님의 말씀에 기초한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 후반부에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주님의 이름보다 주님의 말씀을 높게 하셨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 곧 언약의 말씀을 확고하게 지켜주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왕으로 세워주실 것을 사무엘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셨고, 또 기름부음을 통해 확증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의 칼날에 도망쳐 다녔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다윗이 그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며 광야 생활을 견뎌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힘든 삶을 살 수 있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삶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다윗의 언약을 베풀어 주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을 때에,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4-6절은 현재형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은총과 긍휼을 베푸셨지만,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긍휼과 은총을 베푸시는 분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4절에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고 고백합니다. 또 5절에서는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시기 때문이다.”하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왕위에 오르게 하셨고, 이방 대적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물리치고 제압하는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저절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 하나님은 아무리 크고 높은 분이시지만,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시는 하나님이시고, 교만한 자를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낮은 자를 굽어보시는 하나님은 대체 어떤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흔히 구약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조차도 다 꿰뚫어 보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신의 선하심으로 감싸주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하갈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집안에서 쫓겨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광야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물이 없어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 괴로움 당한 자 환란 당한 자를 굽어보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비록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지만, 그를 향채 책망하시고, 너는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하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명하셨는데, 그때 가인이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가 없나이다.”하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그를 지키시고, 책임져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인이 성을 쌓고 에녹이라고, 곧 헌신이라고 이름을 했고, 자기 아들의 이름도 에녹으로 짓지 않았습니까? 바꿔 말해 자기 자신의 죄악과 연약함을 긍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보잘 것 없지만, 적극적으로 남은 생을 헌신하며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죠.

이것이 실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나 내세울만한 게 없는 우리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품어주신 그 사랑 앞에 남은 생을 헌신하며 사는 삶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헌신이라는 게 특별한 뭔가를 행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자다운 삶, 그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삶을 선택하며 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에 응답해 드리는 삶이죠.

 

오래전에 ‘버드나무’라는 사이트에 올라 온 영상을 하나 봤는데, 김우현 감독, 최춘선 할아버지의 영상을 찍은 김우현 감독이 광야 원정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땅을 밟으면서 찍은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영상에 ‘샤론’ 지역을 쭉 보여주면서, 샤론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부분이 있었죠. 저도 그 부분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는데, 보통 찬송가에도 ‘샤론의 꽃 예수’하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샤론은 산이 없는 지역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샤론’의 본래 단어가 ‘아사르’ 곧 ‘평지’를 가리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우리의 심령 안에 불순물들, 죄로 오염된 것들, 내 자랑거리들, 오만함들을 다 평지로 만드는 것, 그것이 주님의 샤론, 주님의 평지가 되어, 주님의 신부, 주님의 제자되는 길을 닦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영상이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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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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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다윗도 유다 광야로 도망쳐 다니면서, 그 샤론을 이루어가는 길을 밟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아사르’, 그 평지를 통해 ‘의의 길을 걷는 자가 어떤 자여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 주님과 함께 길을 걷는 자, 곧 주님의 신부이자 제자되는 길일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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