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히브리서 11장에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 믿음의 경주자로 산 믿음의 선배들 곧 믿음의 선조들을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고, 어떤 이는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 새 인류의 시작을 알렸고, 어떤 이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도 했다고 말이죠. 또 어떤 이들은 심한 고문을 받았고, 조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당했고, 돌에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서 죽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의 경주자로 살다가 그런 고통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음을 바울이 역설했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좋은 것, 곧 영생의 상급이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 믿음의 선진들이 하늘나라의 올림픽 스타디움처럼 이 땅에서 믿음의 경주자로 살아가는 우리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이 땅에서 믿음의 경주자로 살지만 저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의 스타디움에 입성할 날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죠.
히브리서 12장 전반부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런 믿음의 경주자로 살 수 있는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워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내 힘이나 내 능력으로는 매번 좌절되고 꺾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 믿음의 현실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영광의 부활을 위해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죽음을 끝내 참고 인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스타디움을 바라보는 자지만, 이 땅에서 받는 고난과 고통도 능히 감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그 영광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때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했죠. 그러나 징계는 다 받는 것이죠. 한 가지 징계는 잘못해서 바른 길로 잡아주려고 징계할 수도 있죠. 다른 하나의 징계는 의인이 당하는 징계입니다. 그것은 상급으로 직결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런 두 가지 차원에서 현실세계의 징계를 받을 수 있지만, 어떤 징계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되고 합력하여 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와 같은 권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의 박해를 받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이 그래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주고 바른 믿음의 경주자로 살도록 하기 위해 그런 내용을 권면한 것이었습니다.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 알라딘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왕
www.aladin.co.kr
그것이 지난 시간까지 살펴 본 내용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은 이상의 세계나 천국에서 이루어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믿음은 이 땅의 현실세계에서부터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죠. 믿음의 선진들, 믿음의 조상들도 천국에서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인 게 아니었습니다. 아벨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기생 라합도, 이방 여인 룻도, 모두 이 땅에서부터 그 믿음을 증명해 보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12장 후반부 말씀도 바로 현실의 삶에 대한 믿음의 적용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본문 14절을 통해 아주 귀한 현재적 믿음에 대해 밝혀줍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는 이 말씀은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한 도전이었습니다. 몇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화평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화평할 수 있지만, 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누가 화평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갈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마리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았죠.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도록 해 버리라고 예수님께 청을 넣었죠.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을 잡겠다고 겟세마네 동산에 칼을 들고 온 로마군인을 향해서는 베드로가 칼을 휘두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나를 꺼려하는 사람은 더 멀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거룩함을 따르며 살라는 그 권면은 크리스천에게 큰 도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나긋나긋하게 말한다고 해서, 정돈된 가운을 입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성가대복을 입는다고 더 거룩해 지는 것입니까? 거룩함은 말씨나 옷에 담겨 있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자세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알라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고
www.aladin.co.kr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부분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을 이집트에서 출애굽시킨 후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레19:2)하고 말이죠. 그때 말씀하신 거룩도 그들의 삶의 방식과 관련된 거룩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 밭모퉁이까지 거두지 말고 나누는 것, 열매를 따되 다 따지 말고 나누는 것, 그게 거룩이라고 말입니다. 주일날 살펴본 것처럼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강탈하여 탐한 죄는 거룩한 삶에 대한 계명으로 주신 명령 곧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짓밟는 행위였죠. 그 10번째 계명을 범했을 때 나머지 9가지 계명도 연쇄적으로 다 범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만큼 거룩한 옷을 잘 입느냐 못 입느냐, 예배당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그 차이가 아닙니다. 거룩은 일상의 삶입니다. 주일예배를 통해 거룩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그것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삶으로 연결하는 것,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를 위해 애굽의 방식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구현하도록 율례와 법도로 제정해주신 것이었죠.
그래서 본문 14절에서는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하고 말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줍니다.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하는 뜻이죠.
그래서 깨닫는 게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화평과 거룩은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의 노력으로는 화평한 삶도 거룩한 삶도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 거할때에만 우리가 주님을 좇아 화평과 거룩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제자들은 불을 내려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품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어야 화평과 거룩을 좇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18-21절은 옛날 시내산의 언약을 체결하던 그 때의 모습을 떠올리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9장 9-23절 내용 말이죠. 뭔가 불타오르고, 침침하고, 흑암이 일고 폭풍이 일고, 나팔소리가 울리고, 무서운 말소리가 들리는 그 시내산의 모습 말입니다. 그때 모세조차도 무서워했죠. 그런데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떨도록 땅이 진동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경우 심판에 대한 경고였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흔들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본문 26절에서 상기시켜 주죠. 물론 그것은 최후의 심판을 예고한 것이요, 그 후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있는 거죠.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깨닫도록 하면서 본문 28-29절을 통해 이렇게 끝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 곧 심판 주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물론 이 땅에서 여러 환란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주님 안에서 화평과 거룩의 경주자로 사는 자들에겐 영생의 상급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죠.
[전자책]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알라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오래전 신영복 교수의 책을
www.aladin.co.kr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 안에서 화평과 거룩함을 좇아 살라는 것이죠. 그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지만 주님의 십자가와 사랑 안에서 거룩과 화평을 이루어라가는 것이죠. 주일날 가슴에 새긴 말씀도 일상의 삶으로 거룩을 완성해 가는 것이고요. 그것보다 더 귀한 상급은 없기 때문입니다.
728x90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