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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히브리서를 살펴 볼 때 바울이 히브리서를 쓴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로마 황제의 핍박과 박해를 못 이겨 과거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고 했죠. 그들을 향해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잠시 후에 오실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생명의 단계로 전진해가라는 권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4장 중반부까지 예수님은 유대 민족이 떠받드는 천사보다도, 모세보다도, 여호수아보다도 더 우월하다고 월등한 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4장 후반부에서 어제 읽은 9장까지 계속해서 변증한 것은 대제사장과 관련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아론 후손의 대제사장보다 월등하신 분이라고 말이죠. 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까? 구약의 대제사장이 아무리 훌륭한 중보자라 할지라도 그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죄를 해결할 길이 없는 그로서는 매 해 속죄일이 되면 지성소에 나가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했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 분은 인간이 아니기에 그 분이 단 번에 드린 속죄제물은 영원토록 유효한 제사였다고 했죠. 더욱이 그 분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 분이 말씀하신 모든 언약은 영원토록 유효하다고 말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왜 그렇게 구약의 율법과 성막과 제사법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변증하는 것이겠습니까? 히브리서를 쓴 목적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과거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실은 아직도 옛 법에 얽매여 있는 언약한 신앙인들을 위해 쓴 편지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그 육신으로 구약의 옛 법을 따르려고 하는 초보 수준의 신앙인들 말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탁월성을 변증하여 설명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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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도 어제 변증한 구약의 유한한 대제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제사장되심을 비교 변증한 내용입니다. 그것이 1-18절까지 계속 언급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1-4절만 봐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송아지와 양을 잡아서 구약에 제사를 드리고 죄를 용서받았지만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것을 제사장이 드렸지만, 한 번으로 끝이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구약의 제사는 반복적인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바울이 또다시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구약의 그 연약한 번제물의 제사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양 되신 그 제사는 영원 영원하다는 것을 변증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11-14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주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죄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것이죠. 왜요? 아담과 하와의 죄의 부패성과 연약함을 그 제사장들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이라, 죄가 없으신 분이시죠. 그런 분이 십자가에 속죄 제물이 되셨기에 죄 자체를 없애게 하시는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그 분의 제사는 단 한 번의 제사로 온전히 유효하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제 읽은 9장의 전체적인 말씀과 맥락이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18절까지 그런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읽은 말씀을 한 번 더 핵심적으로 요약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어제도 그렇게 변증하면서 막판에 강조한 게 있었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니” 그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오직 대제사장으로 영원히 유효한 십자가 속죄의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1-18절까지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우월성을 언급한 것이 그 이후에 나오는 말씀, 곧 19-39절의 말씀을 연결시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너희들은 그 분안에서 소망을 품고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23-25절에 나온 바울의 권면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무엇을 권면하는 내용입니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들이 로마 황제의 핍박을 받는다 해도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굳게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아직도 너희들이 옛 수준의 구약의 제사법을 쫓을 게 아니라, 십자가에 영원한 제물이 되시고 속죄제사를 드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소망을 붙잡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서 소망을 품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굳게 잡는 것’ 곧 믿음 안에서 주님을 굳게 붙잡고 사는 것이죠. 또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하죠. 마지막 하나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더 모이기를 힘써 주님을 사모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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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울은 로마 황제의 핍박을 받아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또한 아직도 옛 율법의 제사법과 같은 그 초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품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렇게 권면합니다. 본문 35-3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붙드는 그 담대함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이자, 상급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너희가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가 필요한데, 그것은주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제 잠시 잠깐 후면 오신다고, 바울은 임박한 종말론을 믿었던 자인데, 그때의 관점으로 곧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품고 끝까지 구원받는 믿음으로 전진해 가라는 권면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오직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가, 주님의 사랑을 토스하고 패스하며 사는 자가,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며 사랑과 선행을 하는 자가, 다시금 뒤로 후퇴한다면, 어찌 주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바 있듯이 주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게 하시는 분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신다고 하신 우리에게는 천년같아도 그 분에겐 하루처럼 속히 임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깨어 있는 심령으로 주님 안에서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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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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