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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우리가 아는 바울은 땅끝의 선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기 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던 그 당부를 온 몸으로 실천한 것 말이죠.
실제로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13개 도시를 돌았고 총 2,300km를 누비고 다닌 전도여행을 다녔죠.
그 거리는 목포에서 서울까지 중점 도시를 거쳐가면서 왕복으로 4번이나 왔다갔다 한 셈입니다.
2차 전도여행 때는 21개 도시를 방문했고 걷거나 배를 타고 이동한 거리가 총 5,000km가 넘죠.
그리고 3차 전도여행 때는 24개 도시를 방문하면서 무려 6,000km를 이동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복음전도 여행길에 순탄하고 평탄한 곳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죠.
1차 전도여행 때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는 유럽 대륙의 첫 성읍인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3차 전도여행 때는 에베소의 구리세공업자들이 피운 난동으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릴 뻔 했습니다.
그와 같은 그의 전도여행길에 겪는 일들에 대해 고린도후서 11장 24-27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깨달음)그와 같은 고백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너무나도 힘들고 고달픈 선교여행길을 다녀왔구나, 하는 것이죠.
가는 곳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고침받고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만 있었던 게 아니라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바울이 애초부터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자신을 드리며 살아왔던 자였습니까?
그렇지 않죠.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들의 로망인 산헤드린 의원이 되고자 예루살렘에 유학왔죠.
당시 최고의 율법 선생인 가말리엘 문하생에서 배운 이유가 그것이었죠.
젊은 나이엔 유대사회에서 두각을 내고자 일찍 결혼했고 그때부터 교회의 핍박자로 나섰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맨 앞에서 증인으로 나선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죠.
그처럼 바울은 오직 유대사회의 최고가 되는 꿈만 키운 자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 감옥에 처넣는 앞잡아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정치와 권력과 물욕만을 집착하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다니며 58개 도시를 돌고 14,000km 거리를 누빌 수 있었던 걸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1대 1로 만나주신 그 체험 이후에 그가 변화된 것이었죠.
그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의 것이 전부인 줄 알았던 그가 부활의 세계 영원한 세계에 눈을 뜬 이후에 변화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그 생을 올인하게 된 것이었죠.
(적용)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세계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어쩌면 우리도 1대 1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 세상 것들이 전부인 줄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1대 1로 찾아와 만나주신 이후에야 비로소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세계의 가치를 내다보며 사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30살 이전의 예수님은 일찍 죽은 아버지 요셉을 대신에 모든 가정 경제를 책임지며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게 참된 목적이었죠.
그래서 30살에 가정을 박차고 하나님나라를 이루고자 세상으로 나가셨고 제자들을 부르셨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스승처럼 따르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닦는 자에 불과하고,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선포했죠.
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는 음성을 들었죠.
그러자 다음날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하고 선포했죠.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전까지 수많은 사람이 세례 요한을 스승처럼 따랐는데 그중에는 요한과 안드레도 따르고 있었죠.
그런데 그들이 세례 요한을 제쳐놓고 곧바로 예수님께 따라 붙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시험받은 이후에 많은 병자를 고치는 모습도 목격했죠.
그러자 요한과 안드레는 각각 자신들의 형이 야고보와 베드로를 주님께 데리고 나와 소개했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본래 시몬이었던 베드로의 이름을 게바 곧 베드로로 불러주셨습니다.
귀가 얇아 세상에 흔들리며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뿌리내리며 반석과 같이 살라는 뜻이었죠.
그렇지만 안드레와 그 형 베드로, 요한과 그 형 야고보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라나선 게 아니었죠.
예수님께서는 그곳 갈릴리를 떠나 이방 지역인 스불론과 납달리와 요단강 저편 해변 길로 가셨기 때문이죠.
그로 인해 스스로들 실족한 안드레와 그 형 베드로, 요한과 그 형 야고보는 다시 고기잡이로 나선 것이었죠.
하지만 주님은 갈릴리의 이방으로 가신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코자 함이었고, 곧장 돌아왔죠.
그러면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디로 잡지 못한 안드레와 그 형 베드로, 요한과 그 형 야고보에게 찾아와 다시금 고기를 잡게 해 주시면서, “나를 따르라”하고 다시금 불러주셨죠.
그때 비로소 안드레와 그 형 베드로, 그리고 요한과 그 형 야고보가 주님을 따라나선 것이었습니다.
(본문) 우리가 지금 3주째 살펴본 말씀의 맥락에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중에 첫번째 시간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두번째 시간엔 베드로에 대해, 세번째 시간엔 안드레에 대해 살펴봤죠.
오늘 우리가 유심이 들여다보고 싶은 제자는 야고보입니다.
야고보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소개합니까?
오늘 읽은 마태복음 4장 21절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라고 소개하죠.
야고보의 아버지는 세베대였던 것입니다.
물론 세대의 아들은 야고보만 있는 게 아니라 그 형제 요한도 있었습니다.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막3:17,막10:35,눅5:10)이라 소개하죠.
그만큼 세베대의 아들 중에 야고보가 형이고 요한은 그 동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베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세베대는 당시 어부였지만 갈릴리에서 여러 배를 소유했고 종들도 거느린 부자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아버지 세배대는 ‘갈릴리의 수산시장 대표이사’ 격이었죠.
당시 돈으로 제사장직도 사고파는 시대였기에 세배대의 아들 중에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요18:15)였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어죠.
세배대는 그 정도로 갈릴리 지역에 이름난 부자였고 유대사회의 정치권에 손을 뻗칠 수 있는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큰 아들 야고보는 장차 아버지의 부와 권력을 자연스레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의 어머니는 누구였을까요? 살로메였습니다.
그런데 그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 자매지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사촌지간인 셈이었죠.
다만 야고보와 요한은 어렸을 때부터 풍족한 삶을 살았던 까닭에 안하무인격이었죠.
누군가 자신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무시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사마리아로 지나 유숙할 때 사람들이 허락지 않았죠.그때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해버리시죠”(눅9:54)하고 간청할 정도였죠.
그러자 예수님은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에게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막:17)이라 불렀죠.
앞으로는 너희들만 생각한 채 남을 무시하거나 짓밟지 말고 남을 품으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야고보는 요한은 남에게 못 지고 사는 성격이었고 다혈질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이었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수제자처럼 아낀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도 아주 가까이 두셨던 것이죠.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지만 더 아픈 손가락은 애지중지 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처럼 요한과 야고보 형제도 주님께서 가까이 두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가실 때도(마17:1),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도(막5:37),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칠 때(막1:29-31)도 그랬죠.
심지어 감람산에서 성전을 향해 앉을 때도(막13:3-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러 가실 때(막14:32-35)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요구한 게 있었죠.
“주님,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2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때가 왕위에 오르신 줄 알고 큰 자리를 부탁한 그들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야고보 형제의 어머니 살로메가 친자매였으니 그렇게 요구할 법도 했겠죠.
야고보란 이름도 구약의 야곱처럼 ‘약탈자’란 뜻이었으니 아들의 앞날을 바라본 어머니라면 그럴 수 있었죠.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3-45)
(깨달음)주님께서는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르는 길이 물욕이나 정치권력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른 것이 ‘갈릴리 수산시장 대표이사’가 되는 것도,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거죠.
오히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자기 목숨을 내놓는 섬김의 길이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고보는 그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가치나 깊이를 깨닫지 못했죠.
그 까닭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당할 때 줄행랑치고 만 것이었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요한은 거기에 있었지만 야고보는 멀찍이 숨죽이며 지켜봤죠.
예수님께서 시체가 되어 동굴 무덤에 안치됐을 때는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마가의 다락방을 꽁꽁 걸어잠근 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던 야고보였죠.
그런데 그토록 자기 밖에 모르고 현실의 물욕과 권력욕에 취한 야고보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더욱이 12제자 중에 어떻게 그가 첫 번째 순교자가 될 정도로 완벽한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핍박자였던 사도 바울이 갑자기 세계 선교사로 변화된 것과 같은 이치인데 말이죠.
실제로 야고보는 A.D.44년 헤롯 아그립바 통치 시절에 맨 먼저 순교당한 제자입니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행12:1-3)
그처럼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전도자로 살다가 맨 먼저 죽음에 처한 인물입니다.
어떻게 180도 그렇게 변화된 것이었을까요?
야고보가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다 순교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1대1일로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만나주셨기에 갈릴리 수산시장 대표이사가 되는 것보다도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눈을 뜨게 된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1대1로 만나주셨기에 이 세상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보다 영원하신 하나님나라의 중심에 서는 걸 최고로 여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 승천 후에는 그 누구보다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순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상황에서도 더욱더 담대하게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며 순교로 생을 마감한 것이었습니다.
(적용) 그렇기에 야고보의 삶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야고보도 바울처럼 처음엔 이 세상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 물욕과 정치권력에 눈먼 자로 살았죠.
그런 모습은 주님을 메시아로 믿고 스승으로 따르면서도 결코 달라진 게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1대1일로 만난 이후에야 비로소 이 세상 너머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눈을 뜬 그였습니다.
그래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해던 바울처럼 그도 순교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이죠.
(주문)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 성공과 욕망을 좇아 주님을 따랐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1대1로 만나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눈을 뜨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의 음성으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오늘 내가 너에게 찾아와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너는 무엇을 보고 주님을 따라나섰느냐?”
“네가 주님을 믿고 따른 게 야고보처럼 이 세상의 성공과 욕심 때문에 따른 것은 아니었더냐?”
“갈릴리 수산시장의 대표이사가 되고픈 마음처럼, 예수님을 등에 엎고 영의정 좌의정 자리를 원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죽임당할 때 야고보가 줄행랑치고 도망치듯이 너도 뭔가 실패하면 주님과 거리를 두지 않았느냐?”
“그러나 주님은 그런 야고보를 팽개치지 않고 부활하셔서 다시금 1대 1로 만나주시지 않았더냐?”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그리고 야고보에게 1대 1로 만나주셨듯이 너에게고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시겠느냐?”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너에게도 이 세상의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며 살도록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성격이 야고보처럼 급격하고 야고보처럼 탐욕이 많을지라도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도록 했으면 좋겠구나.”
“오히려 그것이 모든 인간의 속성이니 말이다.”
“다만 부활하신 주님을 1대 1로 만나지 못하면 주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여전히 세상의 것들을 따르는 모습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주님께서는 너를 1대 1로 만나길 원하실 때 기꺼이 너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들였으면 좋겠구나.”
“야고보도 그때 눈을 뜬 것처럼 너도 그때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전정으로 눈을 뜬 자로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것들을 버리라는 뜻 아니라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진정으로 눈뜬 자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찬양)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 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예화)‘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2년간 미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5개월 앞두고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워터게이트 건물에 세 들어 있는 민주당 본부에 5명의 괴한이 침입했죠.
카메라와 전자 도청장치를 설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 침입자 가운데 한 명은 공화당인 닉슨 대통령의 재선위원회 수석경호원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백악관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죠.
조사가 진행될수록 그 사건은 닉슨 대통령의 행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점차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그해 11월 닉슨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유례없는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 다음해 2월 월남전을 종결시키면서 닉슨 대통령은 최고의 절정기를 누렸죠.
그렇게 닉슨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증폭되었습니다.
그 과정 중에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 10명은 1973년 3월 21일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미국에서 명성을 날리던 쟁쟁한 일류 변호사들이었고 최고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 은폐해야 확실하게 감출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닉슨에게 매료된 닉슨의 신봉자들이요 그 누구보다도 현실 세상의 욕망과 권력에 도취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모는 1973년 4월 8일에 모두 들통이 났고, 그때 줄줄이 다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찰스 콜슨’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일을 하던 장래가 촉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현실의 욕망과 권력에 도취돼 닉슨 대통령의 선거캠프에 뛰어들었고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죠.
그 후에 백악관의 수석비서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콜슨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 세상의 물욕과 권력에 취한 바울이나 야고보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닉슨의 행정부가 주도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고자 머리를 맞대고 꾸미다가 결국은 감옥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그는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그때까지도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그가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 명의 상원 의원들의 사랑을 통해 찰스 콜슨에게 1대 1로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헤트필더’, ‘휴스’ 그리고 ‘퀴에’라는 상원 의원들은 날마다 기도하며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소개했습니다.
이제 찰스 콜슨의 형 집행기간이 7개월 남았을 때였죠.
그때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기도하던 세 사람이었는데 ‘퀴에’의 마음 속에 그런 마음을 주님께서 불어넣어주셨습니다.
“퀴에야. 네가 콜슨을 위해 대신 옥살이를 하면 좋겠구나.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었듯이 말이다.”
변호사였던 퀴에는 특수법조문 안에 다른 사람을 대신해 형기를 살 수 있다는 내용을 알고 법원에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제안서는 법원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노력을 알게 된 찰스 콜슨은 마침내 그 감옥에서 교만한 자아를 내려놓고 주님을 모셔들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1대 1로 찾아와 만나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후 주님의 그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고 확신하게 된 찰스 콜슨은 자신도 누군가에게 주님의 사랑을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함께 옥살이를 하는 동료 죄수의 빨래를 자청해서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죄수들도 그의 태도를 믿지 못한 채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이 봉사하는 콜슨의 사랑에 다른 죄수들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그 동료 죄수들은 콜슨이 섬긴 주님의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함께 기도하며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그 깊은 사랑 때문에 그의 교만한 자아가 무너져서 주님을 영접하고 같은 동료들을 섬긴 그 내용은 그가 쓴 〈Born again(거듭나기〉에 나와 있습니다.
(깨달음)그토록 똑똑하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만 좇던 그가 어떻게 주님의 사람이 되어 복음 전도자가 된 것입니까?
세상의 물욕과 권력에 사로잡힌 그의 계획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상원 의원을 통해 찾아오신 주님과의 1대 1일 만남 때문이었죠.
그때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가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주역이 되어 교도소 안에서 복음전도자가 된 것이었죠.
그의 모습은 흡사 주님을 1대 1로 만나 변화된 바울의 모습이거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다를 바 없었죠.
(내음성)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님을 1대 1로 만나기 전에는 나도 찰스 콜슨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교만으로 무장된 찰스 콜슨을 감옥 속에서 만나주신 것처럼 나를 겸손의 자리로 이끄셔서 1대 1로 만나주시는 줄 믿어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체포하는 앞잡이였던 바울도, 갈릴리 수산시장의 대표이사를 내다보고 영의정 좌의정 꿈꿨던 야고보도 1대 1로 만나 주신 주님.”
“저에게도 진정한 구원자로 만나주셔서 이 세상의 것이 다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깨달으며 주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이 세상에 살면서 바울처럼 야고보처럼 찰스 콜슨처럼 일평생 생활속에서 전도자로 살게 해 주세요.”
(찬양)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 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았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1대 1로 만나기 전에는 바울도 야고보도 이 세상의 것만 좇던 자들이었습니다.
찰스 콜슨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 세상의 욕망과 권력에 눈먼 자로 살았던 자였죠.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고 온통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자들까지도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돼 이 세상 너머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좇아 살게 되었죠.
주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셔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좇아 사는 생활 전도자로 살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일을 하면서 그 속에서 생활형 복음전도자로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부르시는 그날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시면서 바울과 야고보와 찰스 콜슨에게 베푼 그 상급을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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