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겉으로 착해보여도 속엔 이리떼와 같은 본성을 지닌 이들도 많은데 말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 크리스천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뿐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20살 된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안팎의 반대세력들 잘 수습했습니다. 그 후에 대외적인 관계를 통해 나라의 안녕을 꾀하기 위해 애굽 왕 바로의 딸과 정략적인 혼인을 했습니다. 그것은 이후에 천명이나 되는 처첩들을 거느리게 된 단초가 되었죠.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저지른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연약함을 토로하며 나라와 백성들을 지혜롭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하나님께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데,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 일천 마리의 번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흡족히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하라고 했을 때,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백성과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참으로 막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백성과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가길 간절히 소망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까지도 줄 것이요, 만약 다윗처럼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면 너의 생명이 장구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죠.
적어도 왕이 된 초기에는 그토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백성과 나라를 공의롭게 이끌고자 힘쓴 솔로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으로, 재판한 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에 ‘창기 두 여자’라고 밝히는 두 명의 여자가 솔로몬 앞에 나와 자신들의 사연을 토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함께 사는 두 여인은 공교롭게도 삼일 간격으로 각자 아들을 낳았는데, 어느 날 한 여인이 자기 아들을 압사시키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자식을 잃을 수 없다는 강한 집념에 사로잡혀 함께 사는 여인의 아들과 자기 죽은 아들을 몰래 바꿔치기를 한 것입니다. 졸지에 한 여인은 자기 곁에는 죽은 아들이 있고, 살아 있는 자기 친 아들은 다른 여인의 품에 가 있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서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급기야 왕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에게 그 사유를 말하고 지혜로운 판결을 요청한 것이죠.
그들은 재판관이었던 솔로몬 앞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우기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솔로몬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처리를 했을까요? 지금이야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머리카락이나 칫솔로 친자를 확인하는 유전자 검사를 하면 정확하게 나오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유전자 검사와 같은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여간 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 친 엄마 외에, 갓난아기 시절에는 아이들이 대게 비슷해 보이니 말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솔로몬이 보여준 것은 인간의 심리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솔로몬은 자식에 대한 독특한 심리 반응을 이용해 이 사건을 심리했습니다. 이른바 살아있는 아들을 둘로 나누어 공평하게 두 여인에게 주라고 명령한 게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판결이라면, 아마 이것은 분쟁을 해결하기 어려울 때, 분쟁의 소지(素地)를 없앰으로써, 소송사건 자체를 말소시키려는 의도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평한 판결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솔로몬의 이 조치는 주변 사람들에게 차선의 판결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것이 솔로몬의 최종 판결이었다면, 자기의 아들을 빼앗긴 여인만, 자기 아들을 반쪽으로 잘라 나누게 된 어머니만 억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솔로몬이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분쟁 당사자인 두 여인에게 주라고 명령할 때, 두 여인의 반응이 정반대로 나타난 것 때문입니다. 자기 아이를 압사시킨 그 여인은, 살아 있는 아기를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차라리 반쪽으로 나누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지만, 진짜 엄마는 살아있는 자기 아이가 반으로 나뉘어 죽게 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아이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시고, 죽이지 말도록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쪽 여자는 차라리 반으로 나누도록 고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차라리 자기 아들을 못 삼을 바에는 이도 저도 못하게 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자기 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 그 상황을 직시한 진짜 엄마는 자기 모성애를 발휘하여 자기 소유권자로 삼을 수 없다면 차리라 아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을 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 여인에게 자기 아들을 주라고 말이죠. 그때 솔로몬이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본문 27절에 “산 아들을 저 여인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아라. 저가 그 어미니라" 솔로몬의 그 판결을 보고 사람들은, ‘과연 명 판결이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아이를 압사시키고 남의 아이를 빼앗아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처럼,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것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보기에는 선한 것 같지만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마7:15)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만큼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구하는데, 심지어 크리스천들조차도 지혜를 구합니다. 하지만 세상적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에는 근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혜의 기준은 모두가 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고, 세상적인 성공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세상에서 바르게 사느냐, 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사느냐, 여기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는 다릅니다. 나도 이기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발맞추어 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혜입니다. 구약시대에 율법의 근간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나라도 바로 그런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떠난 모습이라면, 아무리 지혜로운 것 같아도, 아무리 큰 성공과 업적을 남긴 것 같아도, 결코 하나님의 지혜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잘 되고, 타인도 함께 잘 되고, 사회도 의롭게 살 수 있는 그런 지혜를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할 때에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새벽기도회를 끝내고 6시 30분쯤 유달경기장을 서너 바퀴씩 돕니다. 이후에 새벽말씀을 다시금 정리해서 교우들과 전도대상자들에게 카톡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목사님은 제게 또 다른 새벽묵상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저는 말씀위주의 묵상을 보내는데, 그 분은 세상 돌아가는 상황 위주로 아침묵상을 보내는 것이죠. 어떤 단체에서 만든 것을 보내주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그 중 하나가 깊이 있게 다가왔는데,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사람’이란 제목의 묵상이 그것입니다. 미국에서 많은 기업들이 ‘페이스 팝콘’이라는 여성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데, 네슬레사나 제너럴 푸드, 켈로그, 그리고 캠벨과 같은 다국적 식품회사들이 그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기업들이 그녀의 도움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사람들의 생활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일컬어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부른다는데, 그녀가 예측한 것들이 거의 들어맞고, 또 그녀가 예측대로 경영한 회사들이 성공하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런데 어떻게 그런 뛰어난 통찰력을 얻었는지 그녀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읽었던 성경을 통하여 상상력을 얻었고, 설교를 통하여 통찰력을 얻었고, 주님의 마음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창조력을 얻었습니다.”하고 말입니다. 한 마디로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이 그런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는 험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나도 승리하고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잘 살 수 있는 길을 걷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지혜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루도 세 상속에서 지혜롭게 살기를 원하오니,
하나님의 풍성하신 지혜를 저희들에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통해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세상 속에 들려오는 정보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우는데 우선순위를 두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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