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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역시 ‘고라 자손의 마스길’ 곧 고라 자손을 통해 전해주는 교훈입니다. 시편 44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분은 1-8절까지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9-22절까지로 현실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원통함에 대해 호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23-26절까지로, 하나님께 자신들의 상황을 잊지 말고 구원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시편 44편은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이 도저히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편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논리적인 흐름보다는 시편 기자의 신앙상태와 감정에 따라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그 모든 상황과 내용을 고려하더라도 첫 번째 부분과 그 뒤에 나오는 부분은 너무도 큰 반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알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시고 정착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는 내용이죠. 그런데 두 번째 부분이 시작되는 9절 말씀은 ‘그러나’로 시작되는데, 그 뒷 부분의 내용을 읽어나가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당하고, 치욕을 당하고, 약탈을 당하고, 여러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고, 조롱거리와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것은 17-18절 말씀입니다. 17절에서 우리는 주님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언약을 깨뜨리지도 않았다고 고백하죠. 또 18절에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을 배반한 적도 없고, 우리의 발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처지는 22절과 같이 되었다고 말하죠.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어떤가요? 우리가 주님께 범죄하지도 않았는데 날마다 죽임을 당하고, 잡아먹힐 양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면 이들의 모습 속에서 욥의 모습을 읽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유 없이, 까닭 없이 고통당하는 욥의 모습 말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런 시편 기자의 입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세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내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전부 넘어지고,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실로 죽을 맛이겠죠. 그때 우리의 입에서 어떤 기도가 튀어나오겠습니까? 아마도 본문의 23-26절까지의 내용 그대로를 우리도 토해내지 않겠습니까?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 제가 흐트러짐 없이, 어긋남 없이 거룩하고 의롭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직한 길을 걷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제 주변에 저를 힘들게 하고 넘어드리려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게 하는 것입니까? 제발 깨어나, 고난과 압제에서 건져 주세요, 제발 도와 주십시오, 하고 애절하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애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해답을 이미 읽은 1-8절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행하신 일을 귀로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행하신 일들이 2절부터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의 원수를 무찔러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귀로 전해들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정확하게 그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추측은 할 수 있죠. 그들의 조상과 관련된 신앙 사건들 말입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관련된 사건들이 그것이죠. 그도 아니라면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세와 다윗의 이야기일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어떤 조상이라도 다들 힘든 시절과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 것은 다르지 않았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기근이 찾아왔고,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아내 사래를 잃어버릴 뻔한 일을 겪었죠. 이삭은 두 아들인 야곱과 에서가 원수가 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죠. 그런 고통과 괴로움은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겪은 일이었죠.. 그리고 시편에 등장하는 다윗 역시 사울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의 삶을 겪어야 했죠.
그런 선조의 이야기, 그런 조상들의 이야기를 오늘 시편 기자가 전해 들었다는 것이죠. 특별히 고라 자손의 마스길로 표제가 나와 있는데, 그 고라 자손들이 역시 그들의 조상인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의 고난의 역사를 모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아버지인 고라가 모세에게 반역을 꾀하여 지진이 갈라져 죽임을 당한 사건들 역시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고난의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자세로 꿰뚫고 나가느냐는 것이죠. 그들의 조상들은 세월이 흐른 뒤에 믿음의 렌즈로 자신들이 당한 고통과 시련들을 돌아보고 해석해서 그것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들려줬습니다. 그래서 대대로 그 후손들에게까지, 그리고 오늘 고라 자손들에게까지 그 조상의 역사가 전달된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조상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 민족, 그 조상, 그 선조를 어떻게 그 고난의 역사속에서 건져주셨고, 돌봐주셨고, 이끌어 오셨는지에 관한 역사라는 점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던들 고라 자손의 마스길은 단순한 세상 조상의 역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역사죠. 바꿔 말하면 오늘 우리가 겪는 역경들과 상황들도 고라 자손들처럼 믿음의 눈으로, 신앙의 렌즈로 바라보고 해석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9절부터 계속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바로 ‘주께서’입니다. 9절에서도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10절에서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10절에도 “주께서”, 11절에서도 “주께서”, 12절에서도 “주께서”, 13절에서도 “주께서”, 그리고 14절에서도 “주께서”라는 단어가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스라엘의 조상들, 그들의 선조때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셨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던들 결코 오늘의 자신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과 함께 해 오셨고,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셨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능히 도와 달라고 탄원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죠.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도, 우리 선조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분명코 그 뜻과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23-26절까지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시어, 제발 일어나 깨고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압제에서 건져주세요, 하고 애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죠.
그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경험한 바 있는 사도 바울도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35-39절을 통해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어떤 고난과 고통에 처한다해도, 어떤 원수와 같은 사람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바울이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어떤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영원토록 지켜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참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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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의 삶에 이해되지 않는 고통과 시련이 찾아올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때로는 우리의 실패와 넘어짐이 우리를 좌절케 한다 해도, 그것조차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음을 압니다. 훗날 그런 인생의 고비와 터널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후손들에게 들려주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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