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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시43:1-5)

by 똑똑이채널 202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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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끊임없이 진보해왔습니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인류는 다양한 풍요를 누리고 있으며, 평등, 민주, 평화와 같이 이상들을 하나씩 실현해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인류가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전 인류의 진보가 가속화될수록 그 유토피아의 삶의 이면에는 어둠과 신음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방글라데시 의류 공장 화재 사고가 그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작 몇 푼 되지 않는 임금을 벌기 위해, 그곳의 노동자들은 그 처참한 환경 속에서 일을 하며 살았던 것이죠. 선진국의 저가 옷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들은 눈물의 고혈을 짜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단편적인 사건이지만 그만큼 오늘의 시대적인 양면성을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인류가 평화, 평등, 자유를 부르짖고 있지만 타인의 아픔과 눈물을 밑천으로 자기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이 곧 무엇을 대변해 주는 것이겠습니까? 인류가 아무리 풍요롭고 번영을 가져오고 그래서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지만, 실은 이 땅에 진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는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인류 스스로는 그 어떤 것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우리를 진정한 유토피아로, 누가 진정한 이 세계를 구원해줄 수 있습니까? 오늘 읽은 시편 43편의 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 구원의 주체를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낙심과 불안 속에서 낭패와 고통 속에 있는 자를 건져낼 분, 온통 죄악으로 물든 이 인류를 구원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건져내신다고 고백합니까? 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불안하고 낙심해 하는 영혼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그 영혼의 해결책이겠습니까? 그것들이 잠시 잠깐의 위안과 편안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위안과 진정한 평안은 오직 하나님의 등장, 하나님의 만남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면, 이 세상의 외적인 문제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가운데 밀려들어오시길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 삶이 진정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등장하십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등장을 모든 주어진 상황을 역전시키는 그 능력으로 규정할 때가 많죠. 억눌린 상황이 변화되고,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달라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등장이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죠. 그런데 오늘 시편 기자는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본문 3절입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주님의 대한 위엄과 능력과 모든 것을 역전시키는 대 능력을 펼쳐 보여주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주님의 빛과 진리가 임하기를 원하는 간구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등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말라기서를 끝으로 하나님께서는 400년간 이스라엘을 향해 침묵하셨습니다. 그 뒤에 로마의 압제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죠. 그분의 존재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2-4)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빛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또한 그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요한이 진술한 그 진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능력자,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빛 자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빛과 진리이신 주님을 거절했죠. 그들이 추구하는 빛과 진리는 그분이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자신들의 아집과 편견을 깨트려야만 했기 때문이죠.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구하는 것과 주님의 요구가 충돌했던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고, 진리와 거짓이 함께 할 수 없는 그런 이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어둠으로 진리이신 빛을 덮어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주님의 빛과 진리의 생명을 받을 수 있겠으며, 어찌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보통 학자들은 시편 43편을 다윗이 썼다고 추정합니다. 다윗은 주님의 진리와 빛 가운데 살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 빛과 진리 가운데 인도받는 것은 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죠. 다윗은 두 번이나 자신의 정적인 사울의 목숨을 제거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려고 할 때 나단 선지자가 주님의 빛과 진리로 질책하자 왕좌 앞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말씀의 진리와 빛을 좇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곧 다윗이 70세에 달해 자기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올 때 후회하지 않았노라고, 바보처럼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근거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어땠습니까? 아버지 다윗이 말씀의 진리와 빛을 따르는 그 모습을 보고, 그도 초창기에는 일천마리 번제물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는 그 중심을 빛과 진리로 가득 채우고자 했었죠. 하지만 하나님께 그 인생을 도와주시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고, 그 인생을 빛이 나게 해 주셨을 때, 그가 어떻게 돌변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가치를 지혜와 물질로 국한시켜버렸을 때, 그의 삶은 서서히 붕괴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인생 말년에 그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다며 깨닫게 되었죠.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빛인 그 말씀대로 따라 사는 것이 인생의 본분임을 그는 인생 말년의 무대에서야 깊이 깨닫게 되었죠. 그것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그렇기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대역전극을 써 주시는 것. 우리가 바라는 놀라운 손길로 우리가 예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들을 연출해 주시는 것. 그것들은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런 외적인 능력도 우리에게 실은 필요한 부분들이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등장을 갈망해야 할 부분은 주님의 빛과 진리 곧 말씀으로 우리를 비추시고 바르게 견책해 주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천, 성숙한 크리스천들이 추구해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빛과 진리를 유럽 대륙에 전하고자 자신의 삶을 불태웠습니다. 그때 주님의 도우심이 바울의 인생 곳곳에 배어났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부딪혀 오는 삶 속에서 주님의 빛과 진리로 인도함 받도록 하는 것, 그것을 간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 빛과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낙심과 불안은 찬송으로 변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속한 곳에 빛과 진리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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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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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저희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저희 기준에 맞추려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모진 환경을 바꿔달라는 기도에 너무나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주님의 도움은 빛과 진리를 통해 저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도 저희를 빛과 진리 가운데로 이끄셔서, 낙심과 불안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빛과 진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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