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가 쓰여진 1세기와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아주 놀라운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베스비우스라는 산 중턱에 주민 2,000명 정도가 사는 마을이 있었죠.
A.D. 63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한 노인이 등장했습니다.
그 노인은 자칭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방탕과 주지육림의 부도덕한 생활 속에 빠져 있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저 화산은 폭발할 것이오. 살 길은 두 가지밖에 없소. 당신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거나 아니면 이사를 가시오.”
그런데 그 노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들 미친 노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노인이 미쳤거나 광적인 망언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꼭 16년이 지나간 주후 79년 8월 24일, 베스비우스의 화산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2천 명의 마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다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로마의 장군이요 역사가이며 그 지역의 통치자인 플리니(Pliny)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그 마을에 왔다가 같이 죽음을 당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플리니의 아들이자 소아시아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 2세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한 조각으로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여류 문학가 한 분 있습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썼고 대학 지식층에 상당한 독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집사님입니다.
그런데 수년 전에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만 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녀는 두 달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우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에 남아 있는 두 달을 어떻게 살면 좋을까요”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그분의 마음속에 사랑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후회가 됐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동안 벽을 쌓고 살아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만 스쳤습니다.
그래서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그동안 벽을 쌓고 살았던 사람들과 등을 지고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가서 만나고 용서를 구하고 화목하고 또 등진 사람은 아니지만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더 사랑하지 못하고 격려해 주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격려해 줬습니다.
그리고 재산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빚을 다 깨끗이 갚았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재산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자손들에게 남길 것을 빼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돈을 한 번도 가치있게 쓰지 못한 게 후회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선교사들을 위해서 선교 헌금을 보내고, 구제 헌금을 작정하고, 자기가 죽은 다음에 이렇게 쓰라고 유언장도 작성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성경말씀을 토대로 유언장을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두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런데 몸이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다른 병원에 가저 진찰을 받아보니까 간암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진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어떤 목사님이 그 분에게 그렇게 물어봤습니다.
“후회가 안되십니까? 돈 쓰신 것.’
“아니요 목사님, 지금까지 제 전 생애를 통해 지금의 두 달처럼 의미 있고 가치있게 살았던 때가 없었어요. 저는 앞으로 남아 있는 인생의 시간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 거예요.”
어떤 전도사님이 그 교회 담임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예언에 관한 책자를 보면 2천 년에 종말이 온다는 그런 책들이 많이 있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때 그 전도사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면 우리가 얼마 남았을까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계산을 해보니까 정말로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종말의 때를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에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내가 멀리하고자 했던 사람들까지도 더욱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나 자신을 더욱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고 이런 삶이 진정한 종말론적인 삶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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