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 목사와 박영선 목사의 대담집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이 책은 남포교회 박영선 콕사의 삶과 신앙과 설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엮은 것이다.
박영선 목사는 1948년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해 서울에서 자랐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내세적 신앙에 경도된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한 채 신앙의 회의와 고민에 빠졌다.
1976년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1980년 목사안수를 받고 1982년 미국 리버티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곳에서 존 헌터의 성화에 관한 설교에 영향받아 유학 1년만에 귀국했다.
1982년 남서울교회 부목사로 부임해서 ‘책임을지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는 믿음’이 무엇인지 설교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1985년 서울 잠실에 남포교회를 세워 담임목사로 말씀을 전하고 있다.
1983년부터 설교학 교수로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설교가 무엇인지 신학도들과 함께 씨름하고 있다.
1.영국의 복음주의권에서는 로이드 존스하고 존 스토트가 서로 갈라선 일이 있습니다.
“그때 누가 옳았다”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다 자기 몫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적인 차원에서 거의 분리주의적 입장을 고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면에서는 그보다는 더 넓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희석시켜도 된다느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포용한다고 할 때 내 자리가 없으면 이해든 포용이든 없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도 굉장히 포용적인 인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은 굉장히 선명히 지켜냅니다.
2. 로이든 존스 목사를 왜 20세기 최고의 설교가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주권과 전적 타락이라는 주제로 자유주의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내게 중요했던 사람이 존 헌터입니다.
이 사람의 책 가운데 Let’s Go on to Maturity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그 책을 번안 번역한 설교로 〈구원 그 이후〉를 썼습니다.
존 헌터는 성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거든요.
한국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3. 예정론 하면 아무래도 기계적인 결정론을 가장 많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만 나오면 제일 먼저 갖는 그러한 편견, 거부 반응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우리 손에 다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데까지 오려면 오래 걸리죠.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와 반반씩 나누어 가지는 게 아니예요.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권리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완전한 권리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정론을 마치 기계적인 프로그램처럼 이해하기 쉽죠.
작정 또는 예정을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인간의 자유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겠죠.
그러나 예정이 기계론적 결정론이 아님을 알게 되면 신앙이 추상화로 전락하지 않게 되죠.
자신의 신앙실패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실패 속에서 다시금 올라서게 된 것도 실은 ‘아브라함이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로 바뀌게 되죠.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을 봐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이런 항복을 받아내셨는가’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도 기가 막힐 웅덩이 곧 밧세바 사건으로 죄악에 빠져버렸죠.
그런데 그가 어떻게 빠져 나옵니까?
그가 제사와 예물을 드리고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시편 40편에 있는 대로 주의 뜻을 행하러 오실 분에 의해서,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이유와 원리와 자격을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주의 뜻을 행하러 오시는 분에 의해서죠.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거였습니다.
3. 내가 ‘테레서 수녀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하면 개신교에서 감탄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한탄과 절망의 늪에서 해매던 그 모습에 제게 너무나도 충격이었지만 깊이 공감하는 바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심을 통해 회심으로 이끌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란 책은 감리교 목사가 썼습니다.
우리는 기복적 요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처럼 설교하는 건 싫고 자존심 상할 수 있지만, 거기에 구원이 없다고 말 못합니다.
4. 복음주의는 세 가지 위기를 안고 있다고 지적하시면서 정체성의 위기, 반지성주의, 분파주의를 거론하셨어요.
이런 것들을 좀 간략하게 설명해주시죠.
우리가 기능인이 아니고 신앙인이라는 것을 자꾸 놓치는 것 같앙.
우리는 자꾸 하나님 앞에서 쓸모 있으려고 하죠.
신앙인으로 사는 영광과 특권들을 놓치고 효율적이 되려고 하는 게 정체성의 위기라고 봅니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논리성보다 기적과 감동이 훨씬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분파주의는 경쟁적이 돼서 생기는 것 같아요.
그것은 신학의 부족함으로 인해 생기는 부족함입니다.
인생 전체에 대한 설명이 안 나오니까, 세계관과 인생관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내부 비판, 내부 경쟁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분파주의로 가게 하지 않았나,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5.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이 나오죠.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세 개 나옵니다.
영광, 진리, 은혜죠.
은혜는 진리를 추구해요.
은혜는 진리를 위해서 주어져요.
진리는 언제나 은혜 위에 서 있죠.
그런데 우리는 진리로 가면 은혜가 없어져요.
배타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어요.
예수님은 정죄하려고 온 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진리를 갖고 있을 때 ‘저건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으로 진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은혜위에서 진리를 가졌다’는 걸 증언해야 돼요.
예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오셔서 죽은 것 같이, 진리를 가진 자가 은혜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존재해야 돼요.
이 부분이 어렵죠.
그걸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 같이 하자, 그렇게 밖에 이야기를 못 해요.
*이 책을 읽고 내가 깨달은 바
박영선 목사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전적주권을 온전히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지대한 영향력이 로이드 존스로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존 헌터로부터 깨달은 성화의 삶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젊은 시절 수없이 방황하고 갈등하고 번뇌하고 회의에 빠진 삶도 시간 속에 계신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일로 더 깊은 목회자로 다듬으신 시간과 삶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런 신앙과 신학의 토대 위에서 기존에 내세지향적인 신앙관을 강조하던 한국교회의 강단을 성화의 삶 곧 실천지향적인 삶을 설교한 목회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의로운 삶을 강조하는 건 아니었다.
왠지 어설프고 부족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은 그 삶의 시간 속에서 각자를 다듬고 연단시켜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기에 모든 과정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설교한 것이었다.
이제 그가 쓴 〈성화의 신비〉와 〈구원 그 이후〉 그리고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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