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의 근원은 소통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부자지간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도 소통이 중요한 법이죠.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문제도 실은 그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3년간 그술의 왕 밑에서 머물고 있던 아들 압살롬을 다윗이 불러들였다면, 지난날의 서운한 관계를 풀고, 압살롬의 잘잘못을 따져서 바르게 세워주고, 진정으로 품는 아버지 다윗이 되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왕궁에 들어온 2년 동안 아버지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한 번도 본 적도, 겸상하면서 밥을 먹은 적도 없었죠. 급기야 아버지와 얼굴이라도 보고서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아들 압살롬이 나서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왕궁으로 불러들인 요압 장군의 밭에 불을 질러서, 그로 하여금 아버지 다윗과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얼음장을 놓았는데, 그 일로 요압 장군이 나서서 아버지와 드디어 만남의 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소통의 장이 열리게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2년 동안이나 기다릴 것 없이 처음부터 그렇게 했더라면 아들 압살롬의 마음에 서운한 감정도, 또 그 이후에 백성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서 빼앗아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역모도 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요압 장군이 나서서 아버지와 아들의 소통을 열어주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단지 외적인 소통의 장을 열었을 뿐 내적인 관계, 다시 말해 인격적인 관계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또 부지자간에, 직장의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소통이 중요하되, 그저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인격적인 소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법이죠.
오늘 본문은 그 압살롬이 아버지와 형식적인 만남의 장을 연 이후에, 4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가로채, 드디어 헤브론에 가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 다시 말해 쿠데타를 일으킨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내용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4년 동안 아버지가 도맡아서 해야 할 일들을 가로채 온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고, 급기야 신하들과 함께 헤브론으로 가서 하나님을 섬기고 올라오겠다는 청을 아버지 다윗이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해줬는데, 그 날이 바로 압살롬의 역모의 날이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견줄 수는 없지만,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신앙의 근거지이자 정치적인 출발점인 헤브론을 선택하여 그곳의 백성들과 왕의 신하들과 또 왕의 군사들과 함께 그렇게 역모를 꾀했던 것이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 다윗은 그때서야 아들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가겠다는 것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일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죠. 그래서 결단한 게 후궁 열명만 남긴 채 모두들 함께 예루살렘 성읍을 빠져나가겠다는 것이었죠.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궁을 빠져나갈 때 따라나선 사람들이 누군지, 또 다윗 편에서 후일을 도모한 사람들이 누군지, 그리고 처량한 신세로 빠져나간 다윗이 과연 무엇을 행했는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7-19절입니다.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벧메르학’이란 ‘집’을 뜻하는 ‘베이트’와 ‘외딴 곳’을 뜻하는 ‘마르학’의 합성어로서 지금 다윗은 예루살렘 성읍의 서쪽 기드론 골짜기로 도망쳐가는 길목에 있는 어떤 외딴 집에 다다른 상황입니다. 그곳에 있을 때 다윗 곁에 몰려든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따라붙은 사람들이 가드 사람 600명과 그들의 지도자 잇대였던 것입니다. 그 가드 사람이란 블레셋의 가드 지역에서 망명 온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고, 그들의 대표자가 바로 잇대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피난길에 오른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잇대는 “왕이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함께 있으려한다”면서 따라 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죠. 잇대의 그 고백을 들을 때 마치 누군가의 고백이 겹쳐지지 않습니까? 그렇죠. 모압지방에 이주해 들어간 나오미가 10년 동안 살면서 그 남편과 두 아들들이 죽었을 때, 그리고 다시금 고향 땅 베들레헴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셨다고 할 때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두 며느리에게 한 번 그리고 두 번 이야기하면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 둘째 며느리 룻이 고백한 대답과 똑같이 겹쳐지죠. 그녀도 “어머니가 계신 곳에 내가 있겠고, 어머니가 죽는곳에 내가 죽을 것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하고 고백한 바 있죠. 지금 잇대가 그런 마음으로 고백하자, 다윗은 그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먼저 앞장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피난길에 오른 다윗과 함께 한 두 번째 부류가 있습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이른바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 언약궤를 메고 다윗 곁을 따라붙은 상황입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메고 온 것은 훗날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요, 그때 다윗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그런데 다윗은 그들의 뜻을 가상하게 여기지만, 그것들을 물려 다시금 예루살렘 성읍으로 되돌리게 하죠. 지금 겪고 있는 내란의 책임이 자신의 죄로 인함임을 알고 있던 다윗은 아무리 그 법궤를 가져온다 한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길 수 없는 노릇이요, 만일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신다면 법궤가 없어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하실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은 사무엘상 4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에벤에셀에서 전투를 치를 때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었죠. 그때도 그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단순한 미신처럼 받들었기에 그때 블레셋에게 패배했고, 또 그 법궤를 빼앗겼었죠. 그들의 마음은 회개하지 않는 채 법궤만 신봉한다 한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던 것인데, 다윗이 그것을 지금 거울삼아 행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일과 함께 부가적으로 그들을 돌려보낸 뜻이 있었죠. 언약궤를 지켜야 할 임무와 함께 예루살렘 성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본문 28-29절의 말씀입니다.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그리고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다윗의 길에 동행코자 한 사람이 있었죠. 본문 32절의 “아렉 사람 후새”가 그입니다. 본문 37절에서 그는 “다윗의 친구”로 소개되고 있지만, 그는 다윗에게 책사 곧 지략가였습니다. 그가 따라 붙어서 조언해 주면 좋겠지만, 다윗은 그를 왕궁으로 돌아가게 하죠. 이유인 즉, 본문 31절에 압살롬과 함께 한 책략가 곧 아히도벨이 있는데, 그의 계략을 무효화시키도록 하기 위함에서 왕궁으로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실제로 후에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새의 계략을 더 원하게 되는데,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피난길에 따라붙는 사람이 많으면 다윗에게 군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위안이 되고 힘이 되죠. 그런데 다윗은 그 중에 몇 몇 사람들을 자기 임무를 하도록, 또 압살롬의 책략가를 무력화하도록 왕궁으로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마음이 군급한 다윗이 이때 가장 중요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게 누구이겠습니까? 가드 사람 600명의 대표자 잇대, 법궤를 모셔온 제사장과 레위인들, 책략가로 나선 후새이겠습니까? 아니죠. 오직 생사화복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죠. 그것이 31절에 나오는 “여호와여 원하옵건데” 하는 고백입니다.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배치하긴 했지만 그 너머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의지한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들도 인생의 어려움을 맞이할 때 적재적소의 사람들 도움을 받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죠. 그러나 그들의 도움이나 지략만 믿기보다 그 너머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인간의 최선 너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말이죠. 오늘도 우리 심령 안에 내주하시고 충만케 하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다윗이 죄를 회개한 이후, 소통의 문제로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왕궁을 빼앗기고 피난길에 오른 지금 그래도 지난날 함께 했던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더욱 크고 능하신 하나님께 매달리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저희들도 크고 중대한 일이 생겼을 때 세상의 방법과 조력자들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오직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렇게 인도하실 성령님,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충만함으로 인도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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