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일로 그 남편 우리아를 죽였고, 우리아가 죽었을 때 그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한 후유증을 낳게 하셨는데,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범했죠. 그때 다윗이 암논을 불러 19명의 아들들 앞에서 징계와 채찍을 가했다면 좋았을텐데, 그 일을 행하지 않자,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려고 2년 동안 벼르고 있었고, 급기야 양털 깎는 그 날에 여러 형제들 초청했는데, 그때 압살롬은 큰 형 암논을 죽이고 말았죠. 그리고 그 길로 압살롬은 예루살렘을 떠나 외조부 그술 왕에게 가서 3년 동안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3년이 지나는 동안 그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게 됐는데, 그와 같은 사실을 갈파하고 있던 요압 장군이 나서서 그 압살롬을 왕궁으로 데려오고자 계략을 꾸미죠. 이른바 드고아 지역의 지혜로운 한 여인을 통해 그녀에게 왕에게 해야 할 말을 알려주는 것이었죠. 그때 그녀는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이미 죽은 암논을 다시금 돌이킬 수 없으니, 차라리 살아 있는 압살롬이라도 데려오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으로 품는 모습이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더 나아가 그 아들 압살롬 외에 과연 왕위를 이을 자가 누가 있겠냐면서, 그녀가 말을 전했죠.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그녀의 말이 곧 요압 장군이 넣어 준 말임을 알고서, 급기야 요압 장군에게 압살롬을 불러오도록 했죠. 하지만 압살롬이 왕궁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다윗은 그 아들 압살롬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죠. 그러니 얼마나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이렇게 나를 박대하려면 차라리 데려오지를 말든지, 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겠죠. 그래서 압살롬은 자기 자신을 왕궁으로 데려온 요압 장군에게 책임을 지라면서 요압 장군의 밭에 불을 질러버렸죠. 그때서야 요압 장군에 한 번 더 나서서 다윗 왕과 그 아들 압살롬이 대면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었죠. 그때 비로소 왕과 아들 사이에,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고, 둘이 입을 맞추며 화개애해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죠.
다윗 왕과 압살롬의 관계가 그토록 화기애해하게 좋아져서, 이제는 정말로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며칠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이 시기의 다윗은 영적으로 다운된 상태, 다시 말해 영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인간적인 욕심에 의해 압살롬을 궁궐로 불러들였어도, 다윗은 압살롬이 큰 형 암논을 죽인 죄에 대해 징계차원의 공의나 정의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압살롬이 궁궐로 돌아왔을 때 다윗이 영적인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행해 나가는 다윗이었다면, 압살롬이 돌아왔을 때 무턱대고 그 허물을 덮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것은 2년이 지나 요압 장군의 주선 하에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 입을 맞출 정도로 화기애해한 관계로 발전했다 할지라도, 다윗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 였더라면, 그때에라도 압살롬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 공의와 사랑의 관점으로 그를 책망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기력한 다윗,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다윗이 이 때 보여준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관점은 오간 데 없고, 오직 자식의 허물을 덮는 데만 급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게 오늘 본문의 1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앞 절인 14장 33절을 이어받는 걸 의미하죠. 형 암논을 죽이고 3년간 그술로 도망가 있던 압살롬이 요압장군의 중재로 궁궐로 돌아와 2년 만에 아버지 다윗을 만나게 된, 그 후를 가리킨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버지 다윗의 진노가 사그라지고, 아들 압살롬과 그 관계를 회복한 것처럼 보이는 그 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에 나타나는 1-6절 말씀은 전혀 다른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들 압살롬이 병거와 말들을 갖추고 호위병, 다시 말해 경호원 50명을 대동하고서 아침 일찍이 성문 곁에 나와 사람들의 송사를 재판해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 마디로 다윗 왕이 재판해야 할 일을 아들 압살롬이 나서서 도맡아 진행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 두 해가 아니라, 본문 7절에서는 “4년 만에”, 다시 말해 그 일을 4년 동안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왕을 대신해 어려운 송사를 맡아서 진행한 게 아니라, 본문 6절에서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기”위한 차원에서, 다시 말해 다윗 왕에게 향해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그가 빼앗기 위한 계략에서 그 일을 4년 동안 진행해 왔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그의 용모가 빼어나고, 긴 머리를 가진 매력적인 청년인데, 그가 나서서 백성들의 억울한 송사를 들어서 해결해 주고 있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면서 4년 동안 압살롬은 자기를 찾아오는 백성들에게 자기를 변호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내가 아버지 다윗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 실은 내 여동생 다말을 큰 형 암논이 강간한 것인데, 그 죄악을 내가 처벌하기 위해 암논을 죽인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아버지 다윗이 자신을 미워하지만, 실은 아버지가 못한 일을 내가 했을 뿐이라면서 백성들의 환심을 샀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백성들은 압살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4년 예루살렘 왕궁의 입구 길에서 백성들의 송사를 하나하나 해결해 주며, 자기 사람을 만들기에 바빴던 압살롬이 이제 무엇을 합니까? 본문 7절에 보니까, 압살롬은 그때 다윗 왕에게 자신을 헤브론에 보내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을 합니다. 그러자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다윗은 압살롬이 그저 하나님께 제사하러 헤브론으로 가는 것인 줄 알고 허락해 주지만,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가고자 한 것은 역모를 일으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4년간 예루살렘 성 주변의 백성들 마음을 다 자기에게로 끌어 모았다면, 이제는 다윗을 대적할만한 입지전을 갖추기 위해 헤브론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더욱이 처음 다윗이 헤브론을 수도로 정했다가 7년 6개월이 지난 뒤에는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천도해 갔으니, 그 헤브론 주민들에게는 다윗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남아 있었겠죠. 지금 압살롬이 그것까지도 내다보고 헤브론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갈 때 동행한 자들이 있다고 밝혀줍니다. 본문 11절에 200명이 압살롬과 함께 헤브론으로 내려갔는데, 압살롬의 초청을 받아 내려간 그 200명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당시에 다윗의 관료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압살롬이 쿠데타를 실행하기 위해 내려간 줄도 모르고 함께 따라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그 중에는 다윗의 모사, 곧 책사이자 작전참모 격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도’도 함께 따라갔다고 증언하고 있죠.
이와 같은 상황들을 한 마디로 정리해주는 말씀이 본문 13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14절을 통해, 빨리 이 성을 빠져나가자, 그렇지 않으면 다 죽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16절에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고, 모든 가족들까지도 다 예루살렘 성읍을 빠져나가는 상황이죠. 그야말로 처량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에 갈리게 된 걸까요? 아버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너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모르되 아들의 한 맺힌 것을 몰랐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자 한 아들의 야망도 전혀 몰랐던 것이죠. 그에 비해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약점과 오점을 너무나도 환히 꿰뚫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 먹고자 한 것인데, 문제는 아버지가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한다는 그 진심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 간에 인격적인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은 한 가정의 부모와 자식뿐만 아니라, 회사나 직장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소통도 똑같죠. 소통이 잘 되면 오해하는 장벽이 안 생기기 때문이죠. 더욱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의 소통도 중요한 법이죠. 오늘도 성령님의 크신 은총이 가정과 일터 속에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 인격적인 소통이 부족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일을 꾸몄습니다.
우리들의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직장과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도,
그리고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곳 속에서 진정한 인격적인 소통이 잘 이뤄지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서로의 오해로 인한 장벽들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더욱더 서로를 세워가는 모든 관계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도 깊이 소통하며 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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