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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사무엘하

요압이 일어나(삼하14:21-33)

by 똑똑이채널 202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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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이 말씀 앞에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정상화시켜 나가지 않으면, 누구든지 인간의 달콤한 말과 유혹에 곧잘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어제 살펴봤습니다. 자기 권력에 눈이 먼 요압 장군이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해 있는 것을 갈파하고, 드고아의 한 여인을 불러 다윗 왕에게 해야 할 말을 입에 넣어줬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다시 말해 요압 장군이 그녀를 통해 다윗 왕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던 것은 외조부 집에 3년 동안 머물고 있는 압살롬을 왕궁으로 불러들이고자 한 것이었죠. 그 일을 통해 압살롬이 차기 정권을 잡게 되면 요압 장군이 자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계략으로 드고아의 여인을 불러들여 말하게 한 것이었죠.

그래서 그녀가 다윗 왕에게 말한 요지, 다시 말해 요압 장군이 다윗 왕에게 말하고자 한 요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한 번 엎질러진 물인데 그걸 주워 담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도 함부로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아들을 어찌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이제는 압살롬을 품고 받아주셔야 하는 일이고, 더 나아가 압살롬이 아니면 어떻게 다윗의 왕조를 이어나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드고아의 과부가 한 그 말은 다윗 왕이 듣기에도 일견 타당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해도, 죄악을 저지른 인간을 무턱대고 품는 분이라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압살롬이 아니면 다윗의 후계자가 없다는 생각조차도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게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왜 다윗은 그녀의 말, 다시 말해 그녀에게 그 말을 넣어 준 요압의 말에, 솔깃하여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까? 다윗이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나아가던 젊은 시절의 영성과는 달리, 노년기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이가 많든 적든, 왕성한 젊음의 때든 나이든 노년기의 때든 더더욱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영성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드고아의 과부가 한 말이 궁극적으로 요압 장군이 한 말임을 알게 된 다윗이 그에 따른 대책을 내린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른바 압살롬을 데려오도록 한 내용입니다. 본문 21-23절에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이제 다윗이 요압의 뜻을 허락하여 아들 압살롬을 데려오도록 합니다. 그 명령을 전해 받은 요압 장군으로서는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자기 소원성취를 한 셈이기 때문이죠. 압살롬을 데려오고자 한 게 실은 다윗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을 누리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압 장군이 압살롬이 머물고 있는 그술 땅으로 가서, 압살롬을 예루살렘 왕궁으로 모셔오죠.

그런데 본문 24절은 다윗의 또 다른 실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3년간 그술에 머물고 있던 압살롬을 이제 품기로 작정했다면, 그 압살롬이 오는 날 그를 불러서 함께 식사도 하고, 그 동안에 서운한 감정들을 풀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죄악에 대해 다른 아들들 앞에서 바르게 징계해서, 다시금 그를 사랑으로 세워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진정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아들 압살롬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행한 것과 똑같은 다윗의 모습이죠. 이른바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범했을 때, 여러 자식들 앞에서 그를 불러 세워 회되게 책망하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게 해서 그의 영혼을 바르게 세워줘야 했는데, 그런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다윗이었죠. 이번에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엎질러지긴 했지만 5년 전에 죽인 큰 형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품고자 불렀다면, 그의 죄악을 바르게 책망해서 다시금 그와 같은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불러놓고 이야기했어야 했죠. 하지만 압살롬을 아예 마주하지도 않는 다윗의 처사입니다.

 

 

본문 28절은 압살롬이 예루살렘 왕궁에 들어온 지 2년이 지나가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때까지도 아버지 다윗과 한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거나 이야기한 상황을 전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은 다윗대로, 또 아들 압살롬은 압살롬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죠. 그런 상황 가운데 압살롬은 이스라엘 가운데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고, 그래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흠결이 없다는 소문이 예루살렘 성읍에 파다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만큼 압살롬이 다윗에 이어 왕의 후계가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죠.

그런데도 그 2년 동안 압살롬이 아버지의 얼굴을 공식으로 본 적도 없고, 아버지와 함께 겸상하여 밥을 먹은 적도 없었으니, 서로가 괴롭기 그저 없었겠죠. 그래서 이번에는 압살롬이 먼저 나섭니다. 본문 29절에 압살롬이 요압 장군을 부르는데 그가 오지 않자, 요압 장군의 밭에 불을 질러 버리죠. 그래서 요압 장군이 파악해 본 결과 압살롬이 그 같은 일을 꾸몄다는 걸 알게 되고, 그때서야 압살롬을 찾아갑니다. 자초지종을 물어 본 결과,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뵐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이었죠.

그렇게 해서 다윗과 압살롬이 서로 얼굴을 보게 되는데, 본문 33절이 이렇게 증언해주면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압살롬의 간청을 받아들인 요압의 주선으로 다윗과 그 아들 압살롬 사이에 드디어 상봉하고, 입을 맞추며 부등켜안는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사이가 화기애해한 분위기로 일단락 짓는 것 같은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무엘하 14장의 전반적인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아니고, 드고아 여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압살롬도 더더욱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꼬인 부분을 푸는 것 같고, 서로가 2년 동안 보지 않고 있다가 둘 사이에 화기애해한 모습을 연출하는 그 주인공이 ‘요압’이죠. 그렇다고 그 주인공 요압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관점에서 그 일을 주도했는가? 오직 자기 권력을 견고히 하고픈 생각에서 행한 일일 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어간에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다윗의 모습이죠.

문제는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모습보다 영적인 무기력 속에 있을 때, 그런 틈 탄 요압 장군이 주도적으로 활약하는 사이에, 15장에 넘어가면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큰 환난에 빠져든다는 점입니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킨 게 그것이죠. 한 집안의 가정도, 한 회사의 리더도, 한 나라의 왕도 그만큼 하나님 중심으로, 영적인 성찰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어린 시절부터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도망자 신세의 삶을 살 때, 유다 왕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의 왕이 되기까지도, 그 뒤 이방세력들을 제압하는 승리의 삶을 살 때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놓친 채 인간적인 모습으로 전락해버렸죠. 다윗의 심령에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함이 없으면 인간 요압이 일어나 그 심령을 요압으로 채우게 된다는 점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 심령에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함을 모시지 않으면 인간의 것들이 우후죽순 일어나 가득차 중심을 잡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어린 시절부터 젊은 시절과 중년기에 이르기까지 다윗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인간 중심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권력에 눈이 먼 요압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려 합니다.

그 일이 머잖아 다윗의 가정과 왕궁에 큰 환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주님.

저희 심령에 성령의 내주하심 속에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인간 요압의 것들이 우리 심령에 우후죽순 일어나지 않도록 오직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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