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통치하는 동안 6명의 처첩과 6명의 아들을 두었고, 예루살렘에서 33년간 통치하면서 13명의 아들과 다말,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소실들의 아들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10대 시절에 양을 치면서 자립성의 기반을 갖추고, 20대 시절 줄곧 도망자 신세를 살고, 30대 시절엔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역의 왕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37살 곧 40대부터 10년간 주변 변방들을 정복하는 세월을 보냈다가 이제 47살 곧 50대에 접어들어 안정기를 보내고 있을 그 무렵에 그만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고, 그로 인해 임신하여 그 죄를 덮고자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하는 죄악들을 연쇄적으로 범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업신여긴 꼴이었죠. 그래도 다윗이 위대한 것은 그런 그의 죄악을 책망할 때 사울과 달리 다윗은 침상을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 자복했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회개하는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지만, 죄의 후유증을 겪게 할 것이라고 했죠. 그의 집안에 칼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그의 아내를 누군가 범할 것이고, 그 모든 일이 백주대낮에 만 방에 알려질 것이라는 후유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살펴본 것처럼 다윗의 19명의 아들들 가운데 첫째 아들 암논 곧 모든 가문의 승계자인 그 암논이 아버지의 배다른 셋째 아들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죄악을 그 아들이 동일하게 행한 꼴입니다. 부전자전의 모습이죠.
문제는 그 모든 일을 듣고 난 후에 다윗이 보인 행동입니다. 다윗은 그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했’지만 그에 상응한 책벌이나 문책이나 징계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암논이 장남으로서 장차 왕위를 계승할 자라 그 명예와 권위를 지켜주고 싶었던 까닭일까요? 아니면 다윗 자신이 그와 같은 유사한 죄를 지은 자로서 아들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문제는 이와 같은 공정하지 않는 대처로 인해, 그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배다른 큰 형 암논을 죽이겠다고 벼르고 또 벼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23-39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본문 23절에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다윗의 장남 암논이 압살롬의 친여동생 다말을 범한 후,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압살롬이 자기 양털을 깎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왕의 모든 아들들을 청하여 잔치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아버지 다윗을 초청하죠. 그런데 아버지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가 누를 끼칠까 하노라”하면서 다만 그에게 “복을 빌고” 끝내죠.
그래서 본문 26절에 압살롬은 “그렇게 하지 안하시겠다면 내 형 암논이라도 우리와 함께 가서 잔치를 벌이게 하소서”하고 간청하죠. 그것도 다윗이 처음엔 거절하지만 압살롬이 간청하니까 “그와 함께 가도록” 허락해 주죠.
그런데 본문 28절을 보면 이미 압살롬은 암논을 죽일 계략을 종들에게 다 말해 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이 참석한 그 자리에서 암논을 죽이게 되죠. 그러자 다른 형제들이 모두 도망치기에 바쁜 모양새였죠.
그 소식을 누가 듣습니까? 암논을 보내고 다른 형제들까지 참석토록 한 다윗이 다 듣게 되죠. 그때 다윗은 암논뿐만 아니라 다른 자식들까지도 모조리 죽지는 않았는지, 그걸 염려하게 되죠.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다윗이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암논만 죽었고, 다른 형제들은 다 무사했죠. 그래서 본문 35절에서는 다른 왕자들이 아버지 다윗에게 도망쳐 나온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 압살롬은 37절의 말씀처럼 그 자리를 도망쳐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죠. 그곳에서 3년간 살았다고 밝혀주는데, 아버지 다윗은 그 3년이 지나는 동안 죽은 암논보다 살아 있는 압살롬을 더 걱정하는 모양새이죠.
이상과 같은 상황이 오늘 본문의 총체적인 내용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후유증을 하나님께서 낳게 하신 결과였죠.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다윗의 모습, 다시 말해 자식들 앞에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이 일이 빚어졌다는 것도 함께 읽어볼 수 있습니다.
큰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했을 때 아버지 다윗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게 했거나, 공의로운 징계를 내렸다면요?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죽일 계획을 꾸미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사랑의 매, 징계의 매를 들었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 다윗은 그런 죄를 저지른 암논을 징계치 못한 것입니까?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아버지로가 어떤 존재인지, 자식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배울 기회조차 다윗에겐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다윗의 연약한 모습 아닙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다윗은 어려서부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죠. 사무엘상 16장 11절에 보면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집안의 모든 아들들이 모여서 사무엘이 주도하는 제사에 참여하고 식사도 함께 했지만 정작 막내아들 다윗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의 존재감은 거의 없었던 것이죠. 바꿔 말해 아버지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이죠.
그래서 시편 27편 10절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하고 표현했죠.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큰 것이죠. 그래서 형들도 다윗을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까지 찾아온 다윗에게 형들은 호통을 쳤죠. 삼상 17장 28절입니다. “큰 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은 그렇게 가족 안에서 열등감과 멸시를 받으면서 컸고, 그런 와중에서도 자수성가한 사람 아닙니까?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쳐 다녔고, 또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이제는 온 민족의 왕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리고 이방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죽음의 위기를 숱하게 건너와 지금 그 자리에까지 오른 것 아닙니까? 그런 와중에 19명 아들들을 두고 살고 있는데, 뜬금없이 큰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했다는데,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존재감을 배우고 익히지 못한 다윗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어떻게 질책하는 게 자식을 사랑으로 세우는 길인지 전혀 익히지 못한 그로서 큰 아들의 잘못을 그냥 방치해 버린 것이죠. 그만큼 자식들 사이에 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때 큰 아들 암논을 불러서 자식들 앞에서 호되게 채찍질하고 대화를 통해 바르게 세워나갔다면, 셋째 아들 압살롬이 그런 음모를 꾸미면서까지 죽이려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버지의 부재가 다윗을 힘들게 했고, 또 자기 성공을 위한 시간에는 열심이었지만 자식들을 바르게 세우는 데에는 역부족인 시간들이 문제였던 것이죠.
몇 해 전 신문에 가출하는 청소년들의 첫 번째 이유가 가족 간의 대화단절이라고 통계가 나온 바 있습니다. 청소년 상담의 95%도 부모와의 관계가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하죠.
그런 차원에서 다윗과 암논, 또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볼 때 다윗과 그 아들들의 사이에 대화의 부재는 당연한 일이었고, 그 일로 인해 자식들 사이의 알력과 시기, 또 질투와 권력의 암투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는 다윗을 볼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세상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성장기 시절의 자녀들에 대해 부모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 본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다윗이 저지른 부정에 대해 그 후유증을 겪게 하셨습니다.
큰 아들 암논이 아버지와 똑같은 죄를 저질렀고, 동생 압살롬이 그 암논을 죽였습니다.
죄의 후유증 너머에 다윗에게 또 다른 부족함을 엿보게 하셨습니다.
외적인 성공가도를 달리는 동안 자식들과 대화할 시간조차 내지 못한 게 그것이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문제도 대화가 중요하듯, 부모 자식 간에도 대화가 소중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맡겨주신 성장기 자녀들을 자식을 바르게 세워주는 아버지 어머니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죄의 길을 걷거든 영적인 보모와도 같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걷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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