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범죄로 인해 죄의 후유증을 겪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집안에 칼부림이 일어날 것이요, 그의 아내를 다른 사람이 취할 것이요, 그 모든 일들이 백주대낮에 곧 만 천하에 다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죠. 비록 시편 51편을 통해 눈물로 침상을 적실 정도로 회개와 참회를 주님 앞에 드리긴 했지만, 다윗의 죄를 용서하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죄의 후유증을 겪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는 다윗이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를 삼도록 하기 위함이셨죠. 성화된 인격의 소유자로 신실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 말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불륜관계를 통해 태어난 아들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걸 살펴봤죠. 그리고 두 번째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이가 솔로몬이었습니다. 훗날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3대 왕이 된 인물이죠. 그래서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까? 여디디아였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말이죠.
그 아이를 보면서 다윗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내가 비록 밧세바를 범해 죄를 지었고, 또 죄의 후유증으로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지만, 이제는 두 번째 태어난 아이를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시는구나, 그래서 나도 하나님 앞에 다시금 사랑받는 자로 거듭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겠죠?
오늘부터 읽게 될 사무엘하 13장부터 20장까지는 다윗 집안에 일어난 죄의 후유증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중 첫 번째 사건을 오늘 본문에서 밝혀주죠. 본문 1절에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여기에서 ‘그 후’란 다윗의 성범죄와 살인죄를 지은 그 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 다윗의 장남인 암논이 근친상간을 벌인 일이 오늘 읽은 전반부에 기록돼 있고, 내일 살펴 볼 후반부에는 자기 여동생을 강간한 암논을 벼르고 있던 이복 동생 압살롬이 형제들을 모아 놓고 암논을 죽인 복수극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우선 다윗의 가계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3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고, 또 역대상 3장에서 다시금 밝혀주는 내용인데, 다윗의 가계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소생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 여섯은 헤브론에서 낳았더라 다윗이 거기서 칠 년 육 개월 다스렸고 또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다스렸으며, 예루살렘에서 그가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밧세바)의 소생이요, 또 ‘입할’과 ‘엘리사마’와 ‘엘리벨렛’과 ‘노가’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 아홉 사람은 다 다윗의 아들이요 그들의 누이는 ‘다말’이며 이 외에 또 소실(첩)의 아들이 있었더라.”
다윗에게는 본 처에게서 낳은 19명의 아들들이 있고, 그 밖에 첩의 아들들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중 첫째 아들이 ‘암논’이고, 둘째 아들이 ‘다니엘’ 다른 말로 ‘길르압’, 셋째가 ‘압살롬’ 그리고 그 여동생 ‘다말’이 있었고, 넷째는 ‘아도니야’, 다섯째는 ‘스바댜’, 여섯째는 ‘이드르암’, 일곱째부터 열 번째 아들까지는 밧세바가 낳은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이고, 열한번째부터 열아홉번째 아들까지는 누구의 소생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는 ‘입할’과 ‘엘리사마’와 ‘엘리벨렛’과 ‘노가’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암논의 위치가 어떻습니까? 고대나 근대에 이르러 장자가 모든 주도권, 왕위 계승권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암논이 배다른 아버지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사랑하나’하고 밝혀줍니다.
여기에서 암논이 다말을 사랑한 것은 율법의 금지 사항입니다. “네 아버지의 아내가 네 아버지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레18:11) 근친상간은 금하고 있는 조항입니다. 그런데도 암논이 다말을 사랑했다는 것은 그녀를 존경하거나 고귀하게 대우하는 사랑이 아니라 간통 곧 탐욕을 말하는 것이죠. 마치 아버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것과 똑같은 격입니다.
그걸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친구 요나답 곧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 압살롬에게 계략을 일러주죠. 너의 장자의 지위를 이용해 아버지에게 청하기를, 다말로 하여금 떡을 만들어 내게 가져올 수 있도록 하라고 말이죠. 그래서 다윗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저 큰 아들 암논이 몸져누워 있다는 소식만 접한 채, 그의 소원인 다말로 하여금 떡을 요리해서 오라버니에게 가져다주도록 명령을 내리죠.
그런데 바로 그 일로 인해 암논이 다말을 범하여 동침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욕정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15절에 나와 있죠. 이전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를 범하고서는 그녀를 완전히 매몰차게 내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본문 20절에서는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다말은 온갖 수치를 무릅쓰면서 압살롬의 집에서 머물게 되죠. 그리고 그때부터 압살롬은 그 암논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 21-22절은 참으로 기기막한 사실이 나옵니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큰 아들 암논이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질렀는데도 아버지 다윗이 알고서도 잘잘못을 따져 묻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바르게 훈계하고, 심한 경우에는 다른 자식들 앞에서 엄중한 책임을 묻게 하는 게 아들의 영혼을 건지는 길이죠. 그것이 모든 백성들 앞에 공의와 정의를 보여주는 일이고요. 그런데 다윗은 암논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암논이 장남으로서 장차 왕위를 계승할 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명예와 권위를 지켜주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면 다윗 자신이 그와 같은 유사한 성범죄를 지은 자로서 아들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다윗의 공정하지 못한 이 때의 대처로 인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2년간 칼을 갈다가 암논을 죽여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이때 여러 자식들 앞에 호되게 책망하고 징계를 내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다윗 집안에 일어나는 칼부림의 시작입니다. 다윗의 죄에 대한 후유증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데, 왜 그렇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다시는 동일한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도록, 더욱 겸손하게 남은 인생을 살면서 성화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의 범죄와 반역이 시작되는데, 그만큼 다윗을 연단코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윗의 심령을 묶어 두기 위한 방편이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다윗 집안에 일어난 칼부림과 쿠데타는 다윗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사랑의 사슬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내가 지은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것은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사랑의 사슬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그런 길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자녀를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 심령 가운데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은혜가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다윗의 죄에 대한 후유증을 겪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가면을 벗기고 만 천하에 그 실상을 알리고자, 그 가문에 어두운 그림자들을 드리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을 파멸로 몰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을 다시금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사슬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택한 자녀들을 그렇게 연단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
저희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사슬에 묶여 오늘 하루도 살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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