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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역대상

역대상 12-15장까지 말씀묵상 새벽기도말씀

by 똑똑이채널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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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을 온 이스라엘 왕으로(대상12:1-40)

어제 우리는 베냐민 지파 출신의 사울이 왕이 된 모습, 그 후에 하나님의 제사와 명령을 무시한 채 자기 보기에 좋은 길만을 취하다 그만 버려진 모습, 그리고 그 후임 왕으로 유다 지파 베들레헴 출신 다윗을 지명해서 기름 부어 세운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물론 다윗이 곧바로 왕위에 오른 게 아니라 사위가 되었지만 그 후에 8년간 광야 도피행각을 벌이다가,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의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다가 자결한 후에 다윗이 헤브론에 올라가 76개월간 하나님과 교제의 자리를 취했고, 하나님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 연합한 그 과정을 통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죠. 여호수아 때부터 사울 왕 때까지 거의 400년간이나 정복치 못한 난공불락의 성읍 여부스를 정렴한 그 이후에 말이죠. 그때 다윗은 여부스 성읍을 예루살렘으로 곧 평화의 터전으로 삼았고 그 후에 왕도를 그곳으로 천도한 후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죠. 다윗이 그렇게 명실상부한 왕이 되기까지는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게 아니라 도피행각을 벌이던 아둘람 동굴에서부터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다윗을 위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수 많은 용사들이 함께 한 까닭이었죠.

 

오늘 읽은 역대상 12장은 어제 소개된 다윗의 용사들에 이어 또 다른 용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22절까지는 베냐민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유다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용사들, 23-40절까지는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온 이스라엘지파의 용사들까지 달려 나와 다윗을 왕으로 받든 모습을 밝혀줍니다.

사실 어제도 살펴봤고 사무엘하 2장을 읽을 때도 살펴봤지만, 사울이 죽고 곧바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건 아니었죠. 다윗은 그때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추대되었죠. 그곳에서 76개월간 하나님과 교제하고 온 나라 백성들과 연합하는 과정을 통해 난공불락의 여부스 성읍을 점령한 후에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도피행각을 벌이던 그때부터 다윗을 왕으로 인정한 지파가 있었고,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있을 때부터 온 이스라엘 지파의 용사들이 다윗에게 달려 나와 도왔다고 밝혀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대기 기자는 그런 언급들을 통해 다윗이 사울의 정권을 뒤엎고 권력을 쥔 게 아님을 밝히고자 한 것이죠. 그만큼 온 이스라엘의 용사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왕이었다는 걸 언급한 것이죠.

 

그 과정을 어떻게 밝힙니까? 본문 1절에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역대기 기자는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다윗을 도와준 용사들을 소개합니다. 시글락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던 시절 유대 광야를 전전긍긍하다가 마지막에 숨어들어간 곳이죠. 그곳이 바로 블레셋 가드 지역의 한 곳인데, 다윗은 부하 장수 600명과 그 식솔들을 데리고 가드 왕 아기스 밑에 들어갔죠. 그때 그가 다윗에게 할당해 준 곳이 시글락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있을 때부터 다윗을 도우러 나온 용사들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죠.

 

그들이 누구입니까? 본문 2절에 그들은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화살도 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시글락에 있는 다윗을 도우러 나온 용사들이 실은 사울 왕과 혈족인 베냐민 지파의 용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죠. 같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울과 함께 하지 않는 용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죠. 그들이 자발적으로 다윗에게 나와 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은 베냐민 지파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다윗을 돕고자 한 지파 가운데에는 갓 지파 자손의 용사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숨어 있던 요새는 엔게디 광야(삼상24:2)의 요새로 추정되죠. 그 엔게디 동굴은 사울이 대변을 본 곳이고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맡기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엔게디 광야의 요새로 갓 지파의 용사들이 다윗에게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 16절에서는 베냐민과 유다 지파의 용사들, 19절에서는 므낫세 지파 자손 중에서 다윗에게 나온 용사들도 있었다고 밝혀주죠.

 

그런데 그때 다윗 곁에 몰려든 용사들을 향해 다윗이 말한 내용이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나가서 맞아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평화로이 내게 와서 나를 돕고자 하면 내 마음이 너희 마음과 하나가 되려니와 만일 너희가 나를 속여 내 대적에게 넘기고자 하면 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매.”

다윗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엔게디 요새로 몰려든 용사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자신을 사울에게 넘기고자 잡으러 온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온 것인지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18절에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다윗이 그들을 받아들여 군대 지휘관을 삼았더라.”

그렇게 몰려든 30명의 용사들 중에 우두머리인 아마새는 우리가 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온 것이니 평안하라하고 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마새를 향해 성령님께서 감싸주셨다고 밝혀주죠. 그래서 아마새는 성령님의 이끄심 속에서 다윗에게 말하죠.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하고 말입니다. 그 아마새의 위로와 격려가 실은 성령님의 위로와 격려 아니겠습니까? 보혜사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파라을 뜻하는 말이고 클레토스위로하다는 말이죠. 그만큼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옆에서 위로하시고 보호하시는 보혜사이십니다. 비록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치고 쫓겨나서 빈털터리가 되었을지라도 성령님께서는 다윗과 함께 할 사람들을 붙여줘서 위로하고 격려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아마새의 입술을 통해 불어넣으신 것이었죠. 그래서 22절의 말씀처럼 다윗 곁에는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늘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본문 23-40절까지는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몰려든 여러 지파의 용사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다 지파 자손을 비롯해, 시므온, 레위, 베냐민 자손, 에브라임 자손, 잇사갈 자손, 스불론 자손, 납달리 자손, 아셀 자손, 요단 동편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자손의 용사들까지도 함께 했던 것이죠. 더욱이 40절을 보면 그들은 여러 음식과 밀가루 과자, 무화과 과자, 건포도와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소와 양도 많이 가져와서 함께 나눠 먹었음을 밝혀줍니다.

왜 그런 모습을 밝혀주는 걸까요? 사무엘하 2장에서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76개월간 살 때는 유다 지파의 왕이었지만 여부스 성읍을 점령한 후에는 온 이스라엘 지파의 왕이 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부터 온 지파의 용사들이 함께 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패망한 나라를 재건하는데 하나님과 다윗이 맺은 언약에 기초를 두고자 하는 것이죠.

그 당시 이스라엘은 세계사 속에 작은 변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대제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페르시아의 속국에 지나지 않았죠. 그런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인간의 독단적인 능력이나 정치력이나 군사력만이 능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바로 세워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다윗 왕조에 그 기초를 두고자, 도피행각을 벌이던 엔게디 요새에서부터 블레셋의 시글락을 거쳐 헤브론에 있던 그 시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파의 용사들이 함께 했다는 걸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허물어진 조직과 단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토대를 두고서 모든 이들이 한 뜻을 품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죠. 그 어떤 인간의 독단적인 능력이나 정치력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토대를 하나님의 언약에 두고서 성령님의 도우심과 격려 속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을 모아서 세워가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가정과 일터와 사업장과 그런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주님.

패망한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것도,

무너진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세우는 것도,

저희들 개개인의 힘과 능력으로만 되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파라클레토스 곧 저희들 옆에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가능한 줄 믿습니다.

주님과 언약 백성의 토대 위에서 저희의 가정과 일터와 사업장과 교회를 다시금 세우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 저희들을 야긴의 하나님 보아스의 하나님 도구로 친히 사용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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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대상13:1-14)

사무엘하 5장을 읽을 때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걸 읽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76개월간 살았죠. 그중 2년은 유다 지파의 왕으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내전을 치르는데 세월을 보냈고, 나머지 56개월은 이스라엘의 북쪽과 남쪽을 하나로 연합할 수 있는 여부스 성읍 곧 여호수아 때부터 사울 왕 때까지 400년간 정복치 못했던 그 성읍을 점령하는데 세월을 보냈죠. 그래서 그 성읍을 예루살렘 곧 평화의 터전으로 명명했는데, 그때 왕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한 이후 명실상부한 온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죠. 그의 나이 37살 때의 일로, B.C.1000년 경의 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는 다윗이 자기 나라의 정통성을 하나님의 법궤에 두고자 해서 그 법궤를 예루살렘 성읍으로 곧 자기 성읍으로 모셔 오고자 했죠. 그것이 사울과는 다른 점이었죠. 그런데 그 법궤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실 그 법궤는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빼앗겼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법궤를 부적처럼 여기고자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는 현장에 모시고 갔다가 패했고 그 법궤마저 빼앗겼죠. 그것이 사무엘상 4장에 나온 내용인데 그 뒤 법궤가 어디로 갑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그 법궤를 블레셋의 아스돗 지역에 있는 다곤 신전 앞에 놔두었죠. 그런데 자고 났더니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져버렸죠. 그래서 아나돗 주민들은 이웃 지역인 가드로 법궤를 옮겨갔죠. 그런데 가드 주민들이 독종에 걸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에그론 지역으로 법궤를 옮겨가죠. 그러자 에그론 주민들도 독종에 걸리고 말았죠. 그렇게 7개월가량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지역에 머무는 동안 블레셋 사람들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옮겨가게 하죠. 그때 젓 나는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새 수레에 끌고 가게 했죠. 그날 젓나는 암소 두 마리는 법궤가 올려진 새 수레에 끌고 가는데 새끼들도 보지 않은 채 울면서 끌고 갔죠. 그 법궤가 벧세메스 지역에 오자 그들은 인근 기럇 여아림’(삼상7:1), 다시 말해 바알레유다로 법궤를 모셔다 놓았고 그때부터 ‘40년간그곳에 안치했었죠.

 

이상이 사무엘상 4장에서부터 71절에 나온 법궤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법궤를 예루살렘 성읍으로 옮겨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사실 그런 면을 볼 때 다윗은 사울과 큰 차이를 지닌 것이죠. 사울은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왕도인 기브아로 모실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왕도를 천도한 이후에 곧장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려 한 것이죠. 그만큼 사울은 자기 왕권을 오직 자기 명령에 기반을 둔 자였고, 다윗은 자기 왕권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자 한 것이었죠. 그만큼 다윗은 자기 나라의 정통성을 인간의 욕망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은 그 법궤를 모셔오고자 3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법궤가 있는 바알레유다 곧 기럇 여아림으로 갔죠. 그리고 그 법궤를 모시고 있던 아비나답의 집에서 새 수레에 싣고 모시고 오는데, 그 집의 웃사와 아효가 그 법궤 앞에서 자랑하고 과시하듯 수레 앞에서 거드름을 피웠죠. 그런데 그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를 때 소들이 뛰자 웃사가 그 법궤를 손을 붙잡았죠. 그러자 하나님께 그 웃사를 치셨죠. 그 모습을 바라본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시는 것을 두려워해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모셔놓도록 했죠.

오늘 읽은 역대상 131-14절까지가 실은 그 사건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역대상은 패망한 이스라엘을 다윗 왕조와 성전 중심으로 재건하는데 초점을 맞춘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때 일어난 일들을 다시금 떠올리는 알 수 있죠.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이스라엘, 지금은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변방 중의 변방에 지나지 않는 이스라엘, 그 나라를 다시금 재건하는데 옛 다윗 왕조의 영화처럼 다시금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면, 오직 성전을 중심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의 법궤를 중심으로 재건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상고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이 잘 한 점과 실수한 점을 각각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과연 다윗이 그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시는데 있어서 잘한 점이 무엇일까요? 본문 1-4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다윗이 법궤를 모실 때 잘한 점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법궤를 모시고자 한 당위성이죠. 그것이 곧 나라의 대소사를 자기 방식대로 처리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묻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 법궤를 옮겨오겠다는 것입니다. 사울 때에는 비록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법궤를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라의 대소사를 묻고 나아가겠다는 뜻이죠. 둘째로 잘 한 점이 무엇입니까? 그 일을 독단적으로 하지 않고 지휘관들과 논의하고, 백성들과도 의논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주위 사람들의 자문과 동의를 구했던 것이죠. 셋째로 잘한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들까지 동원할 정도로 그 일을 전심으로 준비하여 온 나라의 기쁨으로 삼고자 한 점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실수한 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다윗이 실수한 게 아니라 웃사와 아히오(7), 다시 말해 웃사와 아효(삼하6:3)가 실수한 것이지만, 더 큰 차원에서 보면 다윗이 실수한 점이라 할 수 있죠. 과연 무엇을 실수한 것입니까? 본문 7-10절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다윗이 그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모시는데 수레 앞에서 웃사와 아효가 거드름을 피우며 몰고 나간 것이죠. 그리고 수레가 기돈의 타작마당’(9, 삼하6:6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뛸 때 웃사가 그 궤를 붙잡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를 치신 일이었죠. 웃사와 아효는 자기 집에서 40년 넘게 있던 법궤가 있었으니 그 앞에서서 주인행세를 한 것이고, 그 법궤가 뛸 때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거드름을 피워서 하나님께서 치신 것이었죠. 그런데도 왜 다윗의 실수로 큰 틀에서 보고자 하는 것입니까? 다윗이 법궤를 모시고 오는 방법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법궤는 출애굽 광야시절부터 고핫의 자손들(4:15) 다시 말해 레위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다녔죠. 그것을 다윗이 망각했고, 그 사실을 웃사와 아효에게 바르게 알려주지 않아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치신 것이었죠. 그만큼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전쟁의 부적용이나 자기 과시용으로 삼을 게 아니라 오직 어깨에 메고 떠받들어야 할 진리와 생명의 말씀임을 다윗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저 법궤만 가져오면 자기 나라의 정통성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볼 때 다윗도 어떤 면에서 보면 자기 나라를 세울 때 법궤를 앞세운 부적용이나 자기 과시용으로 삼고자 한 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깨우치도록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을 본문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패망한 이스라엘, 무너진 이스라엘을 재건하는데 정말로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어깨에 메는 심정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에만 나라와 민족이 바르게 세워질 수 있고, 그 때에만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주님.

패망한 나라를 바르고 굳게 세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법궤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둘 때만 가능한 줄 믿습니다.

그 말씀을 나의 부적용이나 나의 과시용으로 삼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법궤를 어깨에 메듯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것만이 저희의 가정과 일터와 사업장과 교회를 바르게 세우게 하시는 길인 줄 믿습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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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간표 - YES24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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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대상14:1-17)

어제 우리는 역대상 13장을 읽으면서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 오려다 화를 당한 일, 그래서 그 법궤를 나곤의 타작마당에 모시도록 했던 것을 살펴봤습니다. 비록 사울 왕이 자기 욕심을 토대로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한 것과는 달랐고,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토대로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했던 다윗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기 나라를 보호막으로 삼고자 한 부적용이나 백성들 앞에서 자기 과시용으로 보이고자 한 일일 수도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법궤를 수레에 끌고 오는 일을 통해 웃사를 쳐서 다윗을 바로잡고자 하신 것이었죠. 그만큼 다윗의 내적 동기를 바르게 세워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몇 해 전 전남서지방회 전도부 주최로 〇〇교회에서 치유사역세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침례교 교단의 이〇〇 목사님이셨죠. 그 분은 본래 치유능력을 부어달라고 산에서 기도하거나 40일 금식을 하거나 밤에 3시간씩 철야를 한 분이 아니었죠. 어느 날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갑자기 그런 능력을 받았다고 했죠. 그 분도 말하길 목회자의 인격과 무관하게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사와 능력을 주시는 근본 목적은 오직 주님과 더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면 은사와 능력이 임한다고 했고, 그것은 임파테이션을 받거나 능력의 전이 차원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라고 했죠. 그래서 집회를 가면 제일 많이 고침받는 병이 허리 디스크나 관절염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다운증후군도 루게릭병도 류마티스도 모두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목회자가 몸이 불편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지 않는가? 안 나으면 어떻게 되는가 두렵기 때문이고, 또 나았다가 다시 아픈 경우를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나았는데 다시 아픈 걸까요? 그 이유에 대해 그 목사님은 네 가지 차원에서 설명해줬습니다.

첫째는 마가복음 140-44절을 통해 물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줬죠.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재산 많은 과부가 있는데 그 분의 다리가 아파 기도해 줬는데, 하나님께서 만져 주셔서 2년 넘게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다가 다시 재발했다고 하죠. 그래서 다시 기도해 줬는데 1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살았고, 또다시 아파서 기도해 줬는데 6개월을 지냈고, 지금은 기도해 줄 때는 시원한데 금방 다시 아프다고 한다는 것이죠.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죠. 자기 몸을 위해서는 500만원이 넘는 신발을 맞춰 신고 다니는 분이고, 미대에 다니는 자기 딸의 레슨비를 위해서는 천 만 원을 아깝지 않게 쓰는 분인데, 병에서 고침 받는 은혜에 대해서는 단 돈 만 원조차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인색한 분이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이죠.

둘째는 요한복음 514-16절 말씀 곧 죄의 문제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38년된 중환자를 예수님께서 낫게 해 주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와는 달리 아팠다가 다시금 도진 이유가 죄를 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언젠가 주일날 말씀을 드렸는데, 성병을 앓고 있는 집사님을 위해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간절히 기도해 줬더니 나아버렸죠. 그런데 그분은 다시금 그 죄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 살았고, 그래서 다시 그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세 번째는 마태복음 1243-45절 말씀 곧 귀신의 문제 때문이라고 말하죠. 청소된 부분에 더러운 귀신이 더 달라붙는 경우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는 분노와 시기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4:30, 15:30, 16:24, 17:22절의 말씀을 예로 들면서 마음의 즐거움은 뼈의 양약이지만 심령의 근심은 뼈를 상하게 한다고 하죠. 병에서 고침받았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다시는 동일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고, 악한 영을 물리치고, 더 나아가 분노하거나 시기심이 작용치 않도록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재발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치유사역 세미나와 집회를 요청하는데, 그분은 그때마다 하나님께 묻는다고 하죠. 과연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인가, 하는 그 동기 말이죠.

마찬가지죠.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오려고 했던 것이 부적용으로 삼고자 함이었는가, 아니면 백성들 앞에 자기 과시용으로 보이고자 함이었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그런 동기들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심으로 인해 다윗의 마음까지 바로잡고자 하셨다는 것이죠.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곧 동기를 바르게 회복한 다윗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일깨워줍니다. 본문 1절에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신들과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를 보내 그의 궁전을 건축하게 하였더라

이 내용은 사무엘하 511-12절을 읽을 때 이미 살펴본 말씀입니다. 당시 두로는 해상 무역을 통해 제1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나라였죠. 그런 시기에 점차 다윗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이 강성한 대국으로 커가자, 두로 왕 히람이 다윗의 마음을 얻고 또 이스라엘과 좋은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궁궐 건축에 관한 제반여건을 다 제공해 준 것이었죠.

 

그런 두로 왕의 호의에 대해 다윗이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본문 2절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줄을 깨달았으니 이는 그의 백성이스라엘을 위하여 그의 나라가 높이 들림을 받았음을 앎이더라

두로 왕이 자신을 위한 궁궐의 제반여건을 보내줬지만 다윗은 자기 교만에 빠져들지 않았던 것이죠. 웃사를 치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동기를 바르게 깨달은 다윗은 모든 사건 너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기 때문에 더이상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잃지 않은 것이죠. 오히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의 자리도 만유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들, 그것은 내 능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직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죠. 더욱이 그런 은총의 자리, 그런 능력의 부분들은 나만을 위해 사용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영적 지지대로 삼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청지기 자세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맡기시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알았고, 자신에게 허락한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영적인 지지대로 삼을 때, 어떤 은혜를 베푸십니까? 본문 3-7절은 다윗이 낳은 자녀들, 곧 가문을 보여주고 있죠. 시편 1273절에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하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다윗에게 그런 가문의 복을 하나님께서 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8-16절은 다윗이 블레셋과 벌인 전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하 517-25절을 읽을 때 이미 살펴본 말씀이죠. 그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먼저 기도하며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블레셋의 공격을 완전히 물리쳤죠.

중요한 것은 그때의 공격에 대해 본문 15절 하반절이 이렇게 밝히고 있죠. 너보다 하나님이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라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물리쳐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영적인 싸움이든, 육적인 싸움이든,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모시고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너의 개인적인 탐욕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에 대한 것인지, 그 동기를 바르고 분명하게 하라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우리에게도 우리의 가문에도 우리의 세상의 문제까지도 능히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주님.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에 대한 바른 동기를 갖출 때 그에게 일어난 삶의 변화를 살펴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취하고자 하는 세상의 일들이 나의 욕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지,

늘 그 동기를 점검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더욱이 그 자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가려는 영적인 지지대인지도 더욱 살펴보게 하시옵소서.

그런 동기를 갖고 살 때, 하나님께서 저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도 새롭게 세워주실 줄 믿사옵나이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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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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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대상15:1-29)

역대상 13장을 읽으면서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오려고 하다가 화를 당한 일을 살펴봤습니다.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서 그 집에서 나오는데 맨 앞에는 웃사와 아효가 주름을 잡으며 앞장서 나갔죠. 그때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가 뛸 때 웃사가 나서서 그 법궤를 붙잡았죠. 그런데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셔서 그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죠. 왜 그 좋은 날에 다윗이 그런 일을 겪게 되었습니까? 비록 사울이 자기 욕심을 토대로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했던 것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토대로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했죠. 하지만 그 법궤를 통해 자기 나라의 부적으로 삼고자 하거나 백성들 앞에서 보이고자 한 자기 과시용으로 삼고자 한 마음도 있을 수 있기에, 웃사를 치심으로 인해 다윗의 내적 동기를 바르게 세워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되면 인생의 연약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 시련들을 뜻하지 않게 만나면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죠.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가질 수 있고, 모든 사람을 다 부릴 수 있는 다윗도 그런 사건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졌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과연 내가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용으로 또 나의 과시용으로 삼고자 했던 일인가? 하는 자신의 내적 동기를 가다듬게 되는 것 말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 그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모셔 놓았죠. 그리고서는 시간을 두고 자신의 내적 동기도 바로 잡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을 좇아 그 법궤를 다시금 모시고자 다짐하게 되죠.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런 일들을 겪은 후에 다시금 법궤를 모셔오는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하 612-22절을 읽을 때 이미 살펴본 말씀입니다. 다윗은 그때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올 때 웃사와 아효가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도 봤고, 자기 과시용으로 삼고자 한 모습도 낱낱이 지켜봤을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은 자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겠죠? 그만큼 자기 자신의 그릇된 동기도 깨달았을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동기를 좇아 그 법궤를 다시금 모셔오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법궤를 모십니까? 전에는 새 수레에 싣고 나왔죠. 그 방식은 블레셋 백성들이 취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역에 7개월 가량 법궤가 머무르고 있을 때 모두 독종으로 고통당하자 새 수레를 준비해서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법궤를 끌고 이스라엘의 국경 근처 벧세메스로 가게 했죠. 다윗이 처음에는 그런 방식을 취했죠.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전통방식 곧 레위인들로 하여금 법궤를 어깨에 짊어지게 하는 방식을 취해서 다윗 성으로 모셔오게 하죠.

사실 그 방식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명령하셨던 방식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510-22에서도, 출애굽기 371-9절에서도, 그리고 실제 광야로 나서는 길목의 모습을 보여준 민수기 415절에서도 그렇죠. 그 당시 레위 자손들이 성막의 다른 기구들은 모두 수레에 끌고 왔는데, 법궤만큼은 고핫 자손들이 메고 나왔죠.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다윗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이 이렇게 밝혀주죠.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전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고 그것을 위하여 장막을 치고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

다윗이 자기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모실 만한 장막을 준비해서 법궤를 모셔 오는데, 이전과는 달리 법궤를 멜 사람 곧 레위 사람들을 통해 그 법궤를 메고 오도록 준비를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3-11절까지 이르러, 그 법궤를 모시고 올 만한 레위 자손들의 수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두 사람을 불러 모든 레위 자손들을 통솔하여 그 법궤를 모셔오도록 준비하게 하죠.

그러면서 본문 13절을 통해 신신당부합니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전에 겪었던 일 곧 웃사와 아효의 그 사건을 떠올리며, 이제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식 곧 하나님께서 원하신 그 동기를 바르게 해서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신경을 쓰라는 당부죠. 그때 대제사장의 주관하에 레위인들이 법궤를 채 곧 긴 봉을 걸어 어깨에 메고 왔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죠.

 

본문 16-24절 말씀은 그 법궤를 모시고 올 때 행한 일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19절에 놋제금을 치는 자들, 20절에 비파를 타는 자들, 21절에 수금을 타는 자들, 22절에 그 제금과 비파와 수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자들, 23절에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들, 그리고 24절에 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들의 모습이 그것이죠. 그렇게 찬양대를 구성해서 찬양하면서 법궤를 모시고 왔다는 뜻이죠.

그 찬양대의 총 책임자가 바로 17절에 나오는 헤만과 아삽과 에단 곧 여두둔이었던 것이죠. 그만큼 모든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오는 일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9절은 그 기쁜 일에 초를 치는 듯한 말을 전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 왕이 춤을 추며 기뻐 뛰는 모습을 보고 업신여긴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뒷부분은 사무엘하 617-23절에 나와 있죠. 그때 아무런 탈 없이 법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니까 다윗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춤추며 기뻐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본 미갈이 몸까지 드러내는 다윗의 모습이 왕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고 비난을 했죠. 사실 그 비난은 다윗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죠. 다윗은 그 법궤를 붙박이 성막에 안치하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온 백성들에게 축복을 했고,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나눠줬죠. 그리고 이제 자기 집으로 와서 가족들에게 축복을 하려고 하는데 사울의 딸 미갈이 한마디 말을 한 것이죠. ‘왕은 어찌해서 이 계집종이 보기에도 천박한 몸짓을 놀립니까? 왜 몸까지 드러내며 춤추는 것입니까? 그 꼴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하고 말이죠. 그러자 다윗은 그 일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너무 기뻐서 천진난만하게 춤춘 것이요. 나 같은 무지렁이 촌놈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아주셨고 법궤까지도 무사히 모셔왔는데, 내가 이보다 더 천하게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소.’하고 말했죠. 그러면서 다윗이 미갈을 저주했는데,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성경은 증언하죠.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를 리가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 내용은 오늘 본문에서는 임의로 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기에 굳이 그 지파의 수치스러운 일을 들춰낸다 한들 덕이 되지 않겠다고 판단한 까닭이겠죠. 다만 한 가지,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하는 미갈의 개인적인 어리석음은 기꺼이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메는 레위인들이 성결토록 했고, 제금과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불고 춤을 추며 기뻐하는 레위인들의 모습 그리고 다윗의 모습은 흡사 예배자의 모습과 같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모습을 조롱하는 미갈과 같은 자가 있지만, 내가 정말로 기쁨과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자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자라면 어떤 모습이든지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격의 예배가 예배당에서는 물론이고 가정과 일터에서도 삶의 예배자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가 원하는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낙심치 말게 하시고,

그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옵소서.

고난의 렌즈를 통해 우리 자신의 내적인 동기를 늘 살피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주님,

모든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게 하시고,

가정과 일터에서도 삶의 예배를 영적인 예배만큼이나 소중히 드릴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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