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성 목사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이 책은 코로나19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역사를 나눈 말씀이다.
1. 중국 가정 교회의 고난의 시기에 영적 지도자였던 워치만가 병들어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듯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해주셨다.
처음에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도하면 고쳐주시는 것이 응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은혜가 족하다고만 하시나 싶었습니다.
몸부림치멶서 하루 종일 엎 드려 기도하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그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디었는데, 엄청나게 큰바위가 나타나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급히 “하나님, 빨리 저 바위를 없애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나 바위는 물 속에 잠겼고, 배가 그 위로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워치만 니는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바위’라는 장애물이 없어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바위도 능히 넘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육체의 질병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2. 박보영 목사님은 한때 의사였는데 소명을 깨닫고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 일도 하면서 신학교를 다니고 교회 사역을 병행했습니다.
그 즈음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주의 일에 전념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정리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교단 진급 시험이 있던 날, 그는 시험을 보러 갔다가 너무 아파서 시험도 못 치렀습니다.
겨우겨우 교회로 돌아왔죠.
교회 안에 있는 작은 방에 누워 있자니 ‘이렇게 죽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그때 ‘죽더라도 기도하다가 죽어야지’하면서 교회 강단까지 기어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죽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죽어야지 전도하다가 죽어야지.’하고 2층 계단을 기다시피 해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아 지나가던 학생을 손짓으로 불러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학생이 주님을 영접하여 그를 위해 혼신을 다해 기도해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 다리에 힘이 들어갔고, 병으로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는데 음식이 먹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근처 식당에 가서 그래서 식사도 했습니다.
그 후 몸이 회복되기 시작해서 건강을 되찾았고 주님께 쓰임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 순간에 “주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나요?”하고 물으며 주님의 뜻을 받드는 게 중요합니다.
3.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님이 기도에 대한 재미있는 예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듣는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라는 말씀이 너무나 와 닿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다 아신다고 하니, 편해지면서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때는 늘 “다 아시지요?” 바로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대학생이 된 어느 날 “다 아시지요?”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나는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아니?”
그 말씀에 충격을 받고 기도에 대한 자세를 고쳤다고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죠.
4. 강해 설교자로 유명한 존 맥아더 목사님이 목회 초기에 겪은 일입니다.
목회 8년이 되어가던 해에 사랑으로 양육한 다섯 명의 제자들이 교회 중직자들과 함께 찾아와 목사님에게 사임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목사님은 큰 충격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더 이상 목회할 힘 없었습니다.
교회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갈 곳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하는 수 없이 그 교회에 계속 머물게 되었는데, 1년 후에 250명의 성도가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길고 지루하다며 온갖 비난과 공격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이 때도 역시 갈 곳이 없어 그 교회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교회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고 맥아더 목사님은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존 맥아더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를 돌아보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 곳 없는 은혜가 나를 붙들었습니다.”
그렇죠.
갈 곳 없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만큼 한 순간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이 내게 최악의 순간이야, 내게 제일 불쌍해, 하는 생각이 듭니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5. 조선시대에도 피접(避接)이라는 거리두기가 있었습니다.
피접이란 병을 앓는 사람이 거쳐를 옮겨 요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자 임유후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정치 싸움에 휘말려 역병까지 터지자 낙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등왕각서’라는 당나라 시대의 오래된 문장집을 만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그 어려운 문장을 술술 읽고 쓰면서 그는 명문가가 되어 병조 참판의 자리에 복귀했습니다.
패스트가 온 유럽에 창궐할 당시 학생이었던 뉴턴도 고향을 돌아가 2년간 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집중해서 정리했습니다.
그 후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한 많은 학문적 업적들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는 “내가 패스트를 피해 시골에 내려가 있던 2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코로나19로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 시기에도 하나님은 그렇듯 누군가에게 의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 그렇게 요긴한 예화를 소개해서 참 좋다.
그런데 43쪽의 사도행전 18장 9-10절의 ‘소스데네’는 좀더 깊은 성찰이 필요한 내용이지 않나 싶었다.
유기성 목사님은 거기에 나온 소스데네를 고린도전서 1장 1절의 소스데네와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주석들을 참고하면 같은 소스데네가 아님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사도행전의 소스데네가 심한 집단 구타를 당한 뒤에 주님을 영접한 후에 고린도전서의 소스데네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바울이 갈리오 총독에게 끌려갈 당시의 소스데네는 주님 때문에 매를 맞은 게 아니라 유대인과 고린도시민들에게 보복을 당한 셈이었다.
더욱이 그때는 또 다른 회당장 유스도가 있는 상황이었다.
다릴 보면 유기성 목사님은 헬라어 원문이나 주석서를 참고하기보다 성경 연결고리나 묵상의 편린만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가 연결하는 예화나 묵상은 너무 쉽게 다가와 편하기는 하지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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