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요담 왕이 어떻게 끝까지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었는지 살펴봤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그 실패를 답습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성공을 롤 모델 삼아 그 길 따라 순종하며 걸어갔죠. 물려받을 것은 물려받고 끊어낼 것은 끊어낸 것, 그것이 승승장구한 요담의 비결이었죠.
오늘 본문은 그 요담 왕에 이어 남왕국 유다의 12번째 왕 아하스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아하스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6년간 통치했다고 밝혀주죠. 문제는 그가 조상 다윗과 같이 아니하였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어떤 길을 걸었는가? 2-4절이 이렇게 증언하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아하스는 북이스라엘의 왕들 중에 가장 악한 아합처럼 바알 신을 좇았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크고 작은 산당들을 지었고, 산과 나무 아래서 미신을 숭배케 했고, 심지어 자기 아들들을 불살라 이방 신에게 바친 자였죠. 한 마디로 북이스라엘의 아합처럼 아하는 남유다 왕들 중에서 악한 왕의 대명사였던 것이죠. 이 내용은 열왕기하 16장에도 똑같이 밝혀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하스 왕이 이렇게 바알 신과 각종 우상과 미신으로 온 예루살렘 성읍을 더럽히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가만히 두시는가? 아니죠. 그때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를 회초리 삼아 아하스의 악행을 경고하시죠. 본문 5-8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아람 왕이 이끄는 군대를 통해 유다를 치게 하셨고, 뒤이어 북이스라엘 왕이 이끄는 군대를 통해 다시금 치게 하셨죠. 그로 인해 아하스는 자기 왕자들과 신복들을 포함해 12만 명이 죽게 되었고, 2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극을 겪죠. 이것이 자기 보기에는 처참한 패배와 고통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여 다시금 살리고자 하는 사랑의 매였던 것입니다.
그런 면은 본문 9-10절을 통해 나옵니다. “그 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그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넘기셨거늘 너희의 노기가 충천하여 살육하고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로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하나님께서 선지자 오뎃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군대에게 보내 명령하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게 한 것이죠. 이른바 너희 북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가 없느냐, 너희는 바알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느냐, 그때 너희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지 않더냐, 그런데 너희가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지금 유다 백성들의 심판자로 자처하느냐, 그렇게 하지 말고 유다 백성들을 돌려보내라고 하죠. 그래야 너희들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 수 있다는, 그 뜻을 전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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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북이스라엘 군대가 어떻게 하는가? 그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유다의 포로를 돌려보냅니다. 옷이 없는 자들에겐 옷을 입히고, 신이 없는 자들에게 신을 신겨주고, 먹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그들을 나귀에 태워 그 형제들에게 돌려보내는 모습이죠.
그렇다면 자기 백성들이 그 포로에서 돌아오는 모습 앞에 아하스 왕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자기가 무능해서 전쟁에서 패하고 자기 백성들까지 빼앗겼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되찾게 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붙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하스 왕이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본문 16절에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 주기를 구하였으니” 아하스는 풍전등화에 내몰린 상황에서 긍휼어린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게 아니라 신흥 강국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죠. 얼마나 한심한 모습입니까? 그는 그 세상 너머의 모든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죠. 그저 지금 목전의 일만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북으로는 아람과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위협하고 있고, 동으로는 에돔 족속이, 또 남서쪽으로는 블레셋이 사방으로 유다와 자기 자신을 포위하고 있어서, 그 너머의 앗수르 제국에게 원조를 청하는 격입니다. 하지만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도울 이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려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그가 앗수르 제국의 왕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과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를 도와줍니까? 본문 20절에서는 앗수르가 아하스 왕을 돕는 게 아니라, 도리어 공격해 버리는 모습이죠. 수많은 뇌물을 써서 용병을 고용했지만 그게 헛수고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런 곤고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오히려 빠른 때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22-25절은 전혀 엉뚱한 면들을 진행합니다.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진퇴양난에 빠진 아하스 왕, 자신의 생애에 진정 곤고한 날을 맞이한 그는 앗수를 의존하다 못해, 다메섹의 신들을 본떠 예루살렘 성내에 세우고 그것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성전의 문까지 닫게 하는 모습이죠. 이보다 더 악하고, 이보다 더 패역한 유다 왕이 어디에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태어날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처음부터 우상숭배자로 결정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 아하스가 악하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아하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는가?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할 때 아하스의 심정을 이사야 7장 2절이 그렇게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아하스는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그의 전존재가 흔들릴 정도로 극심한 두려움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적들은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격려하셨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타이밍에 일하실 수 있도록, 낙심치 말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격려한 것이죠. 그러나 아하스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곤고한 순간에,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바라기보다 자기 눈에 보이는 인간적 수단들을 더 부여잡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믿음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상을 뜻을 바라보는 모습이죠. 믿음은 나의 환경 너머에서 역사하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이죠.
그런데 그는 그 위기의 순간순간에 두려움에 내몰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려다가 결국엔 우상숭배자가 되고,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백성들조차 우상숭배자가 되게 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오늘 아하스처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다면, 거꾸러트림을 당하고 있다면, 본문 속의 아하스 왕이 행한 일들을 반면교사 삼도록 하십시다. 내게 주어진 곤고한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으키고자 하시는 사랑의 매일 수도 있다는 것 말입니다. 나를 더욱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이끄심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려움에 처할수록, 곤고한 일에 얽힐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리며 나가도록 하시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최악에서 최상을 여건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인생 길 가다가 뜻하지 않게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은 나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낮추시고자, 회개시키고자,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신 환경인 줄 믿습니다. 그때 신속히 하나님 앞에 돌아서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치 않는다고 쉽게 사람과 재물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잠잠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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