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출애굽의 지도를 바라보며 참된 믿음의 로드맵을 세우도록 돕고 있다.
어려운 인생 여행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참된 신앙의 로드맵을 일깨워 줄 것이다.
이 중에 감명깊은 이야기 4개를 짧게 옮겨본다.
1. 유관순은 단지 애국지사로 알고 있지만 그녀의 희생은 십자가 신앙 때문이었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천안 매봉교회에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공주 영명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선교사 앨리스샤프(Alise H. Sharp)는 그녀를 ‘독실한 믿음의 소녀’라고 회고했다고 합니다.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는 정동제일교회의 손정도 목사님의 설교 중 ‘십자가 신앙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 신앙으로 민족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에 특히 감동을 받았따고 합니다.
1919년 3월 13일 유관순이 고향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선언서를 숨겨 가지고 고향 아우내로 내려왔을 때, 고향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에 대한 설득을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어린 조카 유제하를 데리고 천안의 매봉산에 올라, 추운 날씨였지만, 3일간 나라를 위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 3일 동안의 기도를 그녀의 조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흘 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더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그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고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유관순의 말에 고향 사람 모두 이상하리만치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음력 3월 1일, 그 유명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납니다.
과연 사람이 한 일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기도의 힘, 성령의 힘으로 된 일이었습니다.
체포된 유관순은 감옥 생활 중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믿음을 위해 그리고 함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변절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1920년 10월 18세의 나이로 생을 맟니 그녀는 단순한 애국지사가 아닌 순교자로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유관순이 죽자 감옥의 책임자들은 비밀리에 그녀의 시신을 처리하고자 했으나 선교사들의 항의로 결국 정동교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집니다.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이 그녀가 아끼던 성경 한권을 가슴에 얹어주었고 친구들은 양손에 꽃을 쥐어 주어 입관했습니다.
그 후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예배를 다리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그녀의 시신을 안장하게 됩니다.
거사 직전의 마지막 그녀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 내용이 지금의 유관순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2.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그런 문제를 냈다.
누군가 무슨 결심을 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고사성어 네 글자로 괄호를 완성하라는 시험 문제였다.
작( )삼( )
정답은 ‘작심삼일’이죠.
그런데 한 학생이 쓴 답이 ‘작은삼촌’이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왜 그렇게 답을 썼는지 물었죠.
“우리 작은삼촌은 늘 담배 끊는다고 결심하지만 사흘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시내 광야에서 떠난지 3일째 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시내산의 결심과는 달리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3. 건강 제약품 멘소래담으로 백만장자가 된 앨버트 알렉산더 하이드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경제공황 시절 한 때 10만 달러의 빚을 졌던 그가 빚잔치를 한 후 새롭게 결심하고 시작한 것이 십일조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 제정신이냐. 빚더미 위에 앉아 무슨 십일조냐”고 했습니다.
그때도 “나 제정신이네. 내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것이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멋지게 재기했고 10의 2, 3, 4까지, 아니 나중에는 10의 9까지도 드리는 전설적인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늘 유혹받는 것은 다음에 대한 걱정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마음으로 순종했을까요?
순종한 이후의 한 걸음 한 걸음 주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4. 2007년 5월 가정의 달에 송경태 씨의 기사가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 송경태 씨가 아들 송원 씨와 해발 3,000-4,000미터 고지에 위치한 칠레 아타카마 사막 250km 코스를 6박7일간 완주한 기사가 그것입니다.
이로써 송관장(시각 장애인 도서관장)은 사하라 사막, 고비 사막에 이어 세계 3대 사막 마라톤을 완주한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송관장에서 산소하 희박한 그곳, 평지가 거의 없는 험준한 그 코스를 달리며 포기의 유혹이 없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없었겠어요. 너무 여러번 있었지요.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지요. 제가 포기하면 아들도 포기하게 될까 봐 이를 악물고 달렸습니다.”
처음 이 마라톤에 참여한 아들의 고백도 유사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눈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대회 4일째 무릎에 이상이 생겼지만 ‘아버지가 저렇게 달리시는데’ 하며 끝까지 달렸습니다.”
250km 결승지점을 통과하고 포옹을 한 부자는 그 포옹을 오랫동안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아들은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이 이렇게 크고 시원한 것을 평소엔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막에서 아버지와 함께 달린 7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그 부자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늘도 인생의 사막을 달리는 수많은 부모들이 “내가 아직도 이렇게 달리는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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