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기게 주셨죠. 지중해 해변 근처의 블레셋의 경계선, 북쪽의 다메섹과 시리아 지역의 경계선, 사해바다 건너 모압 지역의 경계선, 그 모압 지역 아래의 에돔 지역의 경계선까지 모두 정복해 조공을 바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동서남북 모든 접경지역들을 정복한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시대에 평안함을 주신 은혜죠.
그렇게 다윗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위로 하나님께 전리품을 드리는 감사의 삶을 살았고, 아래로는 백성들과 더불어 공의와 정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중에 사울의 집안 사람, 곧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그 아들 므비보세에게 은총을 베풀었죠. 사울의 밭과 재산을 그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주도록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아들들과 함께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도록 해줬죠. 그때 므비보셋은 ‘두 발이 절름발이’요, ‘죽은 개 같은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면서, 다윗에게 평생 감사하며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므비보셋이 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같다고 했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영적인 절름발이와 같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만큼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후에 다윗이 이스라엘 밖으로 관심을 돌린 모습입니다. 암몬 자손에게 은덕을 베풀고자 한 것이죠. 그런데 그 일을 엉뚱하게 생각한 암몬 왕과 전쟁을 치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암몬 지역은 모압 지역 보다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나라입니다.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죠. 그때 다윗이 그 아버지의 죽음 앞에 조문객을 보낸 것입니다.
사실 사울이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다윗이 도망자 삶을 살았죠. 그때 다윗이 증조 할머니 룻의 고향 모압까지 숨어들어간 적이 있고, 그곳에 자기 부모님을 맡긴 일이 있었죠. 그 어간에 암몬 왕 나하스가 다윗에게 은총을 베푼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바로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다윗이 지금 조문사절단을 보내 나하스의 죽음을 애도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암몬 왕 하눈의 신하들이 왕의 심기를 흐려놓죠. 본문 3절에, 그 신하들이 조문객들이 괜히 왕을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 땅과 성읍을 정탐하여 함락시키려 왔다고 하죠. 그때 하눈은 그 신하들의 말만 믿고,, 그 사절단에게 못된 짓을 하죠. 본문 4절에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이 부분에 대한 표준새번역 성경은 좀 더 구체적으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하눈은 다윗의 신하들을 붙잡아서, 그들의 한쪽 수염을 깎고, 입은 옷 가운데를 도려내어, 양쪽 엉덩이가 드러나게 해서 돌려보냈다.” 한쪽 수염을 잘라 웃기게 만들어버렸고, 또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볼기짝에 구멍을 내듯 도려낸 것입니다. 그만큼 수치와 모욕을 주고자 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사절단을 향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그들을 파견한 다윗 왕에게 수치와 모욕을 주고자 함이었죠.
그런데 본문 5절에 보면 다윗이 얼마나 후덕한 사람인지 알 수 있죠. 그런 수치와 모욕을 당한 조문사절단들에게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하고 배려해 줍니다. 신하이긴 하지만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을 때, 아랫 사람과 함께 할 때, 이런 배려의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본문 6절을 보면 이제 하눈이 전쟁을 준비합니다. 조문객 사절단에게 그런 수치와 모욕을 줬으니, 다윗 왕이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치러 올 것이라 생각하며 먼저 선수를 칩니다.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암몬 왕 하눈이 자신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북쪽 시리아와 다메섹 지역 왕들에게 용병을 요청한 것이죠. 이때 고용된 군인의 수가 모두 3만3천명이었고 기록해 줍니다.
그 소식을 접한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요압 장군으로 하여금 용사들을 꾸려 전장터에 나가도록 하죠. 그런데 요압 장군이 전쟁 경험이 많고 승리의 경험이 많다 해도 3만 3천명을 보고서 겁에 질리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죠. 더욱이 그들의 앞 뒤에서 쥐를 몰 듯이 암몬 자손이 양쪽에서 요압 장군을 압박해 들어오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요압 장군은 담대하고 치밀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먼저 상황을 차분하게 직시하고 작전을 세우죠. 이스라엘의 군사 가운데 최정예부대를 엄선하여 자신이 그들을 직접 데리고 아람의 용병들을 공격합니다. 다른 한쪽 그룹은 자기 동생 아비새 장군에게 맡겨 암몬 족속들을 대항해 싸우도록 하죠. 그러면서 동생 아비새에게 그런 격려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요압 장군은 그 전쟁을 치러야 하는 뚜렷한 목표를 가졌던 것이죠. 그 목표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성읍을 지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하자”
사무엘하 8장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 인근 족속들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요압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러나 지금은 요압 장군이 일개 장군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군대를 총괄하는 군사령관입니다. 그만큼 모든 적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거룩한 부담감으로 적들을 향해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도성을 지킨다는 각오와 목표로 말이죠.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삼아야 할 인생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표는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떳떳이 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종목적지에서 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 목표죠. 그것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물론 진리의 말씀대로 살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받고 조롱당할 수 있죠. 때로는 경제적인 손해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최종목표지점에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목표가 있습니다. 요압 장군이 담대할 수 있었던 동기가 그것이죠.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여호와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요압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담대했고, 그 믿음으로 동생 아비새와 온 군대를 격려한 것이었죠. 믿음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지식입니다. 믿음은 아무 근거 없이 잘될 거라고 믿거나, 자기 ‘긍정의 힘’ 혹은 ‘자기 체면’을 믿는 게 아니죠. 믿음은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의탁하는 자세입니다. 요압 장군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고 맡기며 담대하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심령 가운데도 간직해야 할 참된 믿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여야 하는 것이고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런 인생목표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한 은총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가정과 자녀들과 일터 위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세상을 살다보면 참 두렵고 떨리는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주님,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셈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인생 목표를 삼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뜻 가운데 선한 길로 인도하실 주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합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There are two Christian goals in life.
One is to look to the counting God.
The two are building up the knowledge of knowing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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