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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고린도후서의 본론부 마지막 부분입니다. 10장 1절부터 오늘 13장 10절까지 계속된 내용이 그것이죠. 거짓 사도들에 대한 경고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12장 11-21절을 통해 바울이 세 번째 방문할 것을 예고했죠. 다만 두려워하는 것들을 있다고 이야기했죠. 첫째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 기대에 어긋나 있지는 않을까, 또 그들의 기대에 자신이 못 미칠까, 하는 두려움이었죠. 둘째로 교회의 성도들이 회복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아직도 싸움과 시기와 분노와 경쟁심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교만과 무질서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죠. 셋째로 바울이 가는데 1차와 2차 방문 때처럼 너희들이 외면할까, 그래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죠. 넷째로 고린도교회의 영적 타락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 두려움 속에서 세 번째 방문할 것이라고 밝히는데, 오늘 1절에서도 강조합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이제 곧 방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서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한 사람씩 불러 놓고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동석하도록 해서 확증하게 한다는 것이죠. 구약의 율법인 신명기 19장 1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한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얼마든지 위증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상반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들어보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두 세 사람의 증언을 통해 확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도 확증할 증인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헤혜 속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내게, 주님께서 상급을 주실 때 그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이 내 곁에 있는가, 하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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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예전에 너희들에게 두 번씩이나 갔을 때, 그때도 죄 가운데 돌아서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세 번째 가는데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용서하지 않고 치리하겠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야기하면서 “사랑은 오래참는 것”이라고 말을 하죠. 하지만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첫 유월절 때 성전을 청결케 했는데, 세 번째 유월절 때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이제는 세 번째 갈 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교회를 청결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3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가짜라고 했는데, 그들의 말을 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진짜 사도라면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신 증거를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요구 앞에 바울이 줄 수 있는 것은 ‘너희들이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게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사랑과 온유로 너희들을 대했더니 나를 약한 자로 알았느냐, 이제부터는 불의한 자를 권징함으로서 주님 안에서의 강함을 보여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주님은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듯이, 나도 약하지만 주님의 능력안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헬라어 원문은 ‘너희 자신은’ 하는 말이 맨 먼저 나옵니다. 너희 자신은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해 보라, 곧 확증해보라고, 증명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그걸 모른다면, 너희들이 지금 이 시간에 고린도교회 교인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예수님이 너희들의 심령이 안에 계시지 않다면, 애당초 너희들은 예수님과 무관한 자라는 것이죠. 구원과도 무관한 자라는 것입니다.
6절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너희들이 너희 속을 확증하고 시험하기 위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너희들 속에 예수께서 계심을 확인한다면, 우리 속에도 이미 예수님이 계신 것을 너희들이 확증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7절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악을 행한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말이죠. 하나님을 버린 것, 그리고 터진 웅덩이란 자신을 하나님보다도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죠.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계속 자신을 향해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너희들이 하나님을 바로 모시는 바른 사람이 되는 것, 나는 그것만을 위해서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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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는 앞으로도 진리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불의를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너희들이 우리가 사랑으로 대하든 온유하게 대하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오직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내가 너희들에게 가기 이전에 먼저 너희들에게 이처럼 엄한 편지를 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너희들에게 갔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라고 주신 권능을 너희들을 권징하는데 쓰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 말이죠. 그만큼 이 편지의 의도가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언제든지 척결의 대상이지만, 그들에 의해 선동당한 너희 고린도교인들은 한 명이라도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뒤의 결과가 어땠을까요? 바울이 갔을 때 모든 교인들이 믿음으로 되돌아와 거짓 사도들과 결별했는지, 아니면 바울이 두 세 사람으로 확증해서 권징을 했는지, 우린 알 수 없죠. 하지만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있죠.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머잖아 이 세상을 떠난 뒤 주님 앞에 섰을 때 셈하게 되죠. 그걸 내다본다면, 우리는 스스로 확증하고 증명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매일 내가 참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자인가, 내가 참된 믿음의 삶을 사는 자인가, 그렇게 확증하며 살아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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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문을 통해 나를 확증한다고 할 때 우리의 믿음은 세 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불의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로 믿음은 반드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는 것, 셋째로 믿음은 타인으로 지켜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믿음으로 확증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나라를 위해 불의와 싸우는 것도 자신의 믿음으로 하는 것이죠. 바울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왜 그랬습니까?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였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자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믿음을 날마다 확증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 바울처럼 조금도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 멋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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