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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도직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것은 죄에 빠져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했죠.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말이죠. 바울은 그런 사도의 직분을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 속에서 받았죠. 그래서 바울은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을 다하기 위해 헌신적인 자세로 섬겼죠. 그러면서 거짓교사들의 비방과 선동에 부화뇌동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넓은 마음으로 품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옛 피조물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무리 바울이 그 얄미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품고 사랑한다 할지라도, 거짓교사들이나 세상 사람들과는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죠. 동역하지 말라는 뜻이었죠. 아무리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신앙생활에 선을 긋는 게 필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지 않는 자들이나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과 함께 동역한다면 내가 그들에게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금을 긋고 살아야 세상이 감동과 감화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교회가 교회로서, 성도가 성도로서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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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2-3절 말씀이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바울 사도는 자신을 모함하고 비난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계속 품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곳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의 충동질에 놀아난 탓으로 봤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그런 연약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함께 죽고, 함께 산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동고동락 한다는 것이었죠. 불신자나 거짓 사도들과는 인생의 멍에를 메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부름받은 너희들과는 인생을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목케 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삶이라는 것이었죠.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4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여기에서 담대한 것이 많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거리낌 없이 말한 게 많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죠. 동고동락의 차원입니다. 그렇기에 너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사는 것은 내가 바르게 사는 것이고, 너희들이 그릇 산다면 실은 내가 그릇 사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또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나는 너희에 대해 자랑할 게 많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에 들렀습니다. 그 도시야 말로 우상과 향락의 도시 아닙니까? 그런데 그 도시에 고린도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그러니 바울이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고 눈을 감고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저 분은 가족들이 핍박했는데도 예배에 참석해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말씀 속에 뿌리를 내렸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그들이 거짓 선지자에 넘어가고, 바울 사도를 잘못 오해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들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또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사도직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데 있었죠. 그런데 그 화목케 하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키 위해 모든 환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은 이미 6장 4절에서 밝혀준 바 있었습니다. “환란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이른바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사도직을 위해 9가지 환란을 당했던 바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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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속에서도 무엇이 넘쳤다고 고백합니까? 오늘 본문 4절 끝부분에 “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그 환란과 고통 에서도 위로와 기쁨이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위로와 기쁨이 넘친 것은 자의적으로 넘친 게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문법상 수동태로서, 주님으로부터 나온 위로요 기쁨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환란 속에서 어떻게 위로가 넘쳤을까요? 5절입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헬라어 원문은 ‘왜냐하면’이 맨 먼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갔다고 합니다. 환란 속에서도 기쁨이 넘친 게 마게도냐로 간 것과 연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봤지만 고린도후서 2장 12절 말씀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 갔을 때, 그 드로아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심령이 어땠습니까? 13절에서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바울은 디도를 보내고 올 때가 됐는데도 오지 않자, 직접 마게도냐로 건너가려고 드로아 항구로 나갔죠. 그런데 그곳 드로아 항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죠. 하지만 바울의 심령은 더없이 침몰되는 상황, 가라 앉은 상황이었죠. 고린도교회에 세 번째 자신이 써 준 편지를 들고 간 디도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점점 더 복음의 문은 열려서 기뻐해야 할 것 같지만 바울은 디도 때문에 점점 더 괴로웠던 것이죠. 그때 바울이 그렇게 편하지 못한 마음 곧 가라앉은 마음을 안고 드로아 사람들과 작별하고 메게도냐로 직접 건너간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상황입니다. 다시 5절에 “(왜냐하면)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고린도후서 2장 13절에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심령이 편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게도냐를 갔는데, 그곳에서 당장 디도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몸과 마음이 편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만큼 매일 기뻐하고 허허롭게 웃었던 게 아니라 괴로울 때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이 마게도냐에 가서 밖으로는 다툼을, 안으로는 두려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이란 초조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게도냐를 건너갔는데 디도를 못 만나니까 초조함이 밀려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6절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렇게 초조해 하고 있는데 디도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디도를 볼 때 하나님의 위로가 바울의 마음속에 쏟아진 것이죠.
왜 그런가? 7절에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디도가 바울이 써 준 세 번째 편지를 들고 갔는데, 그 편지를 읽으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회개하고 애통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디도가 보고하는데, 바울이게 위로와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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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되죠. 사도 바울 같이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알면서도, 내가 어디에 가든지, 영이신 주님께서 나를 품고 계심을 알면서도, 불안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조하고 두려워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내적인 불안과 초조와 근심과 걱정을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습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자기 눈으로 보면서 그 내적 불안감을 극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을 앞을 보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못 봅니다. 사람은 자기를 못 보기 때문에 사도 바울 같이 위대한 스승도 때로는 자기 불안 속에 빠지는 것이죠. 그런데 디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에게 베푸신 그 은총을 자기가 확인함으로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초조와 불안과 근심으로부터 자유케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성도의 거룩한 교제가 이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내가 근심과 걱정 속에 있지만 저 형제 자매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피차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보여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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