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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1절부터 7장 16절까지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마지막 단락을 통해, 거짓교사들의 침투로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마침내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됐다고 했죠. 그것이 가능케 된 것은 바울이 디도 편에 보낸 눈물의 편지를 통해 성령님이 역사하신 까닭이죠. 바울은 그 편지를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었죠. 어느 정도였나요? 혹여라도 내가 그 편지를 잘못 보낸 것은 아니었는지, 바울이 잠시 후회할 정도로 엄격한 내용이었죠. 그런데 그 편지를 받은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근심을 함으로 회개하기에 이르렀다고 했죠. 그 근심이란 자신들의 삶을 회개하는 신령한 근심이었죠. 그래서 7장 16절을 통해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의 근심이 전반적인 삶의 회개 곧 성화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 회복을 통해 그들에게 신뢰를 받은 바울은 이제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구제의 연보에 관한 이야기죠. A.D.46년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팔레스타인 지역 곧 예루살렘 교회에 큰 흉년이 들었죠. 그 교회를 향해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연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걸 고린도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을 땐 말하지 않았고, 지금은 거룩한 근심을 통해 하나님 앞에 바르게 회복되었기에 동역자의 관점에서 그걸 다시 꺼내는 것입니다.
8장 1절에서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관계를 ‘형제들아’하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도 형제라고 불렀는데, 그때는 그들의 잘못 앞에 각성하도록 부른 것이죠. 오늘은 의례적으로 부른 게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형제 곧 진짜 형제의 관계로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증언합니다.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쪽 지방인데, 고린도보다 위쪽에 자리잡은 아테네, 그 위 베뢰아, 그 위 데살로니가, 그 위 빌립보지역의 교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데, 바로 마게도냐교회에서 예루살렘교회에 구제 연보 하는 걸 은혜라고 여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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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빌립보서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보면 마게도냐 교인들이 가난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신들보다 더 가난에 처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연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죠. 하나는 예수님께서 “주라 그리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눅6:28)하신 말씀처럼 ‘먼저 주라’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힘들기 때문에 받아야 된다는 게 아니라, 부자든 가난한 자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게 있는 것으로 누군가와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때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덧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풍성한 ‘연보’ 곧 헬라어 ‘하플로테스’(ἁπλότης)는 영어로 ‘리버럴리티’(liberality)인데 관대함 곧 ‘너그러움’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나보다 더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관대함이요 연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예물로, 내 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연보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물은 잘 드리지만 구제 연보는 약한 게 사실이죠. 그런데 3절에서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마게도냐교회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4절에서는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헬라어 원문에는 ‘간절히’ 앞에 ‘심히’라는 부사가 들어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구제 연보를 자원해서 할 뿐만 아니라 그 연보를 사도들에게 해 달라고 심히 간절하게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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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풍성한 연보를 한 까닭이 무엇인가? 자신들을 먼저 주님께 드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설령 콩 한 조각밖에 없을지라도 주님께 드리는 심정 곧 주님의 마음을 지녔기에 그것을 나눴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이 말씀은 10절과 연결돼 있는 증언입니다. 10절에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년 전 디도가 고린도교회에 있었는데, 그때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교회를 돕자고 먼저 꺼냈다는 것이죠. 그런데 거짓교사들이 침투하고 영적으로 혼란에 쌓이면서 그 일이 중단되었는데, 지금은 회복이 되어 다시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한 때 그들은 흔들렸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다시 회복돼서, 구제 연보를 하나님의 은혜처럼 풍성하게 나누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회복했다면 구제 연보를 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명령하지 않았다는 거죠. 자발성을 상실한 연보는 연보일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른 이의 간절함’ 곧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의 간절함을 말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사랑에 대해 말해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만 하고 사람에 대한 구제 연보를 하지 않으면 진실된 사랑이겠느냐는 것이죠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진실된 사랑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도록 권했다는 것입니다.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 부요하신 분이지만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 자체가 자발적인 가난을 취하신 분이죠. 우리를 생명으로, 진리로, 사랑으로 부요케 해 주기 위함이죠. 덴마크의 왕처럼요. 물론 예수님이 궁핍해지지 않았죠. 오히려 생명의 메시아로 더 부요케 되셨죠.
그래서 10-11절에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이제는 너희들의 영적인 유익을 1년 전에 마음 먹었던 계획을 이제는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너희들이 구제 연보를 하는 그 마음 중심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주릴 때, 목마를 때, 헐벗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마시고 입히고 찾아간 것이 곧 주님께 한 일이라고 한 것처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3-14절에서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구제 연보는 받는 사람만 풍족하게 되고 하는 사람은 곤고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둘다 균등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15절에서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출애굽기 16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거뒀는데, 장막 안에 들어가서 보는데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둔 것 같지만 식구대로 나누고 보니까 다 같았다는 것이죠. 많아도 많지 않고 부족한 것 같아도 부족하지 않은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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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우리 각자는 물질의 종착역이 아니라 통로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종착역이 되면 썩고 부패하지만 물질의 통로로 살면 나의 영혼도 살고 하나님 앞에 상급도 받는다는 것이죠. 그런 은혜가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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