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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1절 이후의 내용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도직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는 데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사도의 직분을 맡은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2천 년 전 사도로 선택받은 몇 몇 제자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 자신들이죠. 교회라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도 부르심을 받는 자들의 모임이죠. 그런데 주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하죠. 보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보내심을 받은 자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요 곧 ‘사도’입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순서도 마찬가지죠. 신약성경에 맨 먼저 등장하는 것은 복음서 곧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굿 뉴스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 말입니다. 쉽게 말해 에클레시아의 내용이 복음이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고 불러주신 것 말이죠. 그 복음서 다음이 사도행전이죠. 사도행전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세상 속에 보내심을 받은 써내려간 역사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배당에서 새 힘을 얻고, 세상에 나가 진리의 삶을 살도록 보냄을 받은 자들이죠. 그런 점에서 저와 여러분들 모두 이 시대의 ‘사도들’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주신 목적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는 데 있다고 했죠. 그래서 우리를 사도로 부르셨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화목하는 삶, 그리고 세상의 죄악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했죠. 물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했죠.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절대적인 순종 속에서만 세워질 수 있죠. 바울은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사도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 정의했습니다. 그 말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옛 피조물과 새 피조물을 비교한 것입니다. 옛 피조물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해 타락한 피조물이고, 새 피조물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 피조물입니다. 로마서 6장 4-5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만큼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 옛 피조물의 상태죠,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이 새 피조물의 상태입니다. 쉽게 말해 초등학생의 마음을 죽여야 중학생이 될 수 있고, 처녀의 마음을 지닌 여자가 죽어야 아내가 될 수 있고, 총각을 고수하려는 남자가 죽어야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 이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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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3-13절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사도직을 수행해 왔는지 설명해주었습니다. 온갖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사도직을 지켜왔다고 했죠. 왜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은혜를 덧입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6장 11-13절에서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뒤에 거짓 교사들 곧 거짓 선지자들이 침투해 들어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선동했죠. 그들은 바울 사도에게는 정식 추천서도 정식 자기소개도 없다면서 주님의 사도가 아니라고 했죠. 그런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한 성도들이 바울 사도를 모함했다고 했죠.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바울은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죠.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향해 넓은 마음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왜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은혜를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옛 피조물의 상태였다면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보복했겠죠. 하지만 새로운 피조물의 은혜를 더입은 바울이었기에 그들을 품는다고 한 것입니다. 다만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통해 바울은 그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모두를 포용한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자와는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은 거래나 전도도 하지 말라는 차원이 아니라고 했죠. 그들과 동역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이란 세상 밖의 사람들, 그리고 고린도교회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따로 있으라는 것은 구별하라는 뜻이었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인 너희는 세상과 선을 긋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과 선을 긋고 살 때 감동과 감화를 받습니다. 하지만 선이 불분명하면 세상이 내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 녹아나게 되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지 못하죠. 바울 사도는 세상과 철저하게 선을 긋고 살았습니다. 심지어 참수형 당할 정도로 분명한 선을 긋고 살았죠. 그래서 로마 역사가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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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읽은 2절 말씀은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지난 시간에 6장 14-7장 1절까지는 세상의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은 다릅니다. 이 말씀은 6장 13절의 말씀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6장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너희들이 거짓교사들의 부화뇌동에 의해 나를 비난하지만, 나는 새로운 피조물된 자로서 너희들을 품도록 마음을 넓힐 것이니 너희들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고했습니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2절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으로 ‘영접하라’는 헬라어 ‘코레오’(χωρέω)는 공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죠. 그 사람이 내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두지 않고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불가능하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불편했지만 그들을 향한 마음의 공간을 열어두고 살았던 것입니다.
2절 후반절에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불의해서도, 해롭게 해서도, 속여 빼앗아도 안 된다고 말이죠. 그런데 바울 사도의 말 중에서 정작 중요한 단어는 ‘아무에게도’입니다. 그 단어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죠. 고린도교회에 거짓 사도들은 바울 사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그들에게 선동당한 성도들이 바울 사도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런 성도들에게 똑같이 불의로 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3절이 중요하죠.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너희 중에 그런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죄하고자 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죠?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 내가 이렇게 진리를 다시 일깨우는 것은 내가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너희들을 마음에 품고 함께 죽고 살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동고동락을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나 거짓 사도들과는 인생의 멍에를 메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부름받은 너희들과는 인생을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화목케 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삶이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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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도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삶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삶이죠. 그것은 이 땅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삶이죠. 동고동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긋지 않으면 그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살게 되죠. 그것은 세상에 선을 긋지 못하는 삶이자, 빛도 소금도 될 수 없고, 궁극적인 사도로 부름받는 삶이 될 수 없죠. 그렇기에 진정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산다는 것은 타락한 이 세상의 가치관에 선을 긋는 삶입니다. 그 삶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며 동고동락할 때 누군가 새로운 피조물의 은혜를 덧입게 하는 진정한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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