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유기성 목사가 영성일기 페이스북 칼럼을 모은 것이다.
이 중에는 2014년 가졌던 6개월간의 안식년 기간 중에 칼럼이 포함돼 있다.
그 중에서 다섯꼭지 이야기를 옮겨봅니다.
1. 필립 얀시란 기독교 복음주의 작가가 특별 강연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창녀였다가 새 삶을 살기로 결단한 40개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여인들이 요청한 바였습니다.
자신들도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은혜’에 대해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이었죠.
얀시는 그들의 요청을 거저할 수가 없다고 여겨, 주최 측에 그런 요청을 먼저 했습니다.
“은혜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먼저 그들의 말을 듣게 해 주세요.”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며칠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얼마나 조롱과 학대를 받으며 살았는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필립 얀시가 그때 그분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필립 얀시가 그들에게 주님의 그 말씀을 전하자, 그 자리에 참석한 그 분들이 깜짝 놀라더랍니다.
그때 필립 얀시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하필 여러분이 가장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누구도 그 즉석에서 대답을 못했고, 침묵과 함께 시간이 지날 무렵, 불가리아에서 온 창녀가 더듬더듬 말하는 것이었죠.
“모든 사람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쁨으로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내려다볼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요! 가족도 친척도 친구들도 다들 나를 창피해합니다.
사람이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진정으로 은혜를 갈망하게 되지 않을까요?"
필립 얀시는 그때 가장 정확한 은혜를 정의해줬다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느끼는 자가 은혜를 갈망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에게 긍휼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 말입니다.
2. 문준경 전도사님이 전도해 세운 임자진리교회에 이판일 장로님이 있습니다.
6.25 때 예배드렸다는 이유로 공산당 무리들이 어린 아이들을 포함해 48명의 성도들을 생매장했습니다.
그날, 문준경 전도사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후 장로가 된 이판일 장로의 가족 13명이 다 순교했습니다.
오직 그날 목포로 갔다가 현장에 없던 아들 이인재가 유일한 생존자였죠.
후에 국군 정벌부대가 가족들을 몰살시킨 원수들을 붙잡아 놓고 이인재에게 총을 주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그들을 쏴 죽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라”하는 주님의 음성과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괴로워 몸부림치다가 결국 그 음성에 순종해서 원수들을 다 용서했다고 하죠.
그로 인해 6.25전쟁으로 마을에 불어닥친 무서운 보복 학살이 멈춰섰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들은 모두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마을은 완전히 복음화가 되었죠.
이인재는 나중에 목회자가 되었고, 고향 진리교회에 와서 목회하다 은퇴를 했습니다.
3. 문준경 전도사님이 공산당에게 붙잡혀 목포로 끌려왔습니다.
그때 문준경 전도사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검사국 조선총독부 검사 요다 카츠키에게 심문을 받았죠.
그러다 국군이 목포를 점령하자,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다시 증도로 돌아가려고 했죠.
그때 이성봉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지금 증도로 들어가면 죽어요.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세요.”
증도는 그때까지도 공산군이 장악하고 있던 터였기에, 이성봉 목사님이 말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준경 전도사님은 “전 죽어도 좋아요. 제가 안 가면 교인들이 다 죽어요.”하면서 다시 증도로 들어갔고, 끝내 순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함께 목포로 잡혀 왔던 양도천이라는 신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도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을 때, 그는 “나는 안 가겠소.”하면서 자기 살길을 찾아갔다고 하죠.
나중에 양도천은 세계일가공회라는 이단의 교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순교의 영광과 이단의 교주가 한순간에 갈리는 것 아닙니까?
고난이 밀려올 때 고난당하는 것, 죽어야 할 때 죽는 게 확실히 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우리 자신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고난을 맞이할 힘을 주시는가, 바로 그것이죠.
주님은 우리에게 큰 믿음이 있느냐, 큰 능력이 있느냐, 그걸 바라보시고 원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난 중에서도, ‘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느냐’하는 것, 바로 그것을 눈여겨보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4. 세미한교회 최병락 목사님이 쓴 〈다시, 일어남〉에 은혜로운 내용이 있죠.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텍사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동네 연못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열 살이 되던 해,삼촌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삼촌은 어린 맥스를 데리고 태평양이 보이는 산타 모니카 해변으로 갔습니다.
넓은 백사장과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 바다를 보고 어린 맥스는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1,000번을 뛰어들어도 파도는 1,000번을 받아주었습니다.
맥스를 가장 감동시켰던 것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였습니다.
그 많은 물이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지 계속해서 맥스에게로 밀려왔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보던 맥스는삼촌을 보면서 조용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삼촌, 파도가 계속 밀려와요.”
맥스는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그때 삼촌이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맥스, 너 그거 아니?”
“뭐요?”
“오늘 밤에 와도 파도가 계속 계속 밀려온단다.”
맥스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농담하지 말아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물이 있을 수 있어요? 말도 안 돼요.”
삼촌은 또 물었습니다.
“맥스, 너 그거 아니?”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흥분한 맥스가 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1,000년 전에도 이 파도는 똑같이 밀려왔단다.”
눈이 휘둥그레진 맥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맥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삼촌은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맥스, 너 그거 아니?”
또 놀랄 일이 남았느냐는 표정으로 맥스는 삼촌을 쳐다봤습니다.
“우리가 다 죽고 난 1,000년 후에도 이 파도는 계속 밀려올 거야.”
맥스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표정으로넓은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넋을 잃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삼촌에게 물었습니다.
“들어가봐도 돼요?”
“그럼!”
신이 난 맥스는 온몸에 모래를 묻히고는 파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순간 밀려오는 파도가 맥스를 덮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온몸의 모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맥스는 다시 모래사장으로 나와 모래를 더 묻혀서 파도에게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파도는 더 큰 팔을 벌려 맥스를 덮치고 지나갔습니다.
1,000번을 뛰어들어도 파도는 1,000번을 받아주었습니다.
맥스는 그날 진종일 멈추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와 그렇게 놀았습니다.
자기의 어릴 적 경험을 한참 신나게 이야기하던 루케이도 목사님이 잠시 침묵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봤습니다.
침 넘기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예배당이 조용해졌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아서 1,000번을 넘어져도 우리를 향해 다시 밀려옵니다."
그 순간 마치 그 큰 예배당에 하나님의 은혜의 파도가 정말 밀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 은혜에 압도되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하고 생각할 때도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파도는 우리를 향해 밀려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머리로도, 지식으로도, 경험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 온더웨이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잭 헤이포드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이 세미나를 통해 바울과 실라의 2차 전도여행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 빌립보 지역으로 간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된 유력한 사람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얼마나 때렸던지 그들은 의식을 잃은 채 깊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당시 빌립보 감옥에는 경범죄자를 가두는 외옥과 중범죄자를 가두는 내옥이 있었는데, 바울과 실라는 깊은 곳에 있는 내옥에 갇혔습니다.
깜깜한 감옥 속에 갇혀 의식을 잃은 두 사람 중에 바울이 먼저 깨어났습니다.
높은 곳에 달려 있는 창문 틈새로 달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분명 밤이었습니다.
찌르레기, 풀벌레 소리를 들어 보니 꽤나 깊은 밤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마나 흠씬 두들겨 맞았던지 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온폼이 멍투성이가 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발을 움직여 보니 묵직한 차꼬가 살을 찌르며 발목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실라가 궁금해졌습니다.
‘실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말라 비틀어진 입술에 겨우 침을 바르고, 떨어지지 않는 목젖에 힘을 주어 조용히 불러 보았습니다.
“실라,거기 있나?"
무엇에 놀란 듯 어둠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러고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울? 자넨가? 자네 살아 있었구먼. 몸은 괜찮은가?”
“괜찮냐고? 아파 죽을 지경이네. 몸이 말을 안 들어. 자네는?”
“나도 성한 곳이 없어. 온 몸이 멍든 게 틀림없어”
“그런데 실라, 한 가지 물어 봄세. 자네 지금 기분 어떤가?”
“기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실라가 대답 했습니다.
“기분이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바울은 기다렸다는 듯 즉시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기분 되게 좋지? 주님 때문에 매도 다 맞아 보고,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내 기분이 지금 어떤 줄 아나? 춤추고 싶다네”
“나도 그런데 ! 우리 그럼 춤이나 한번 설컷 출까?”
“그것좋지!”
두 사람은 일어나 더듬으면서 서로를 찾았습니다.
몇 번을 허공을 휘젓다가 마침내 서로의 손을 잡고 감옥의 어둠 한가운데 섰습니다.
그때 바울이 흥을 돋웠습니다.
“준비됐나? 원, 투, 쓰리, 포!”
“우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춤을 추며 찬양합니다.
우리 주 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춤을 추며 찬양합니다.
춤을 추면서 춤을 추면서 주를 찬양합니다. 춤을 추면서 춤을 추면서 주를 찬양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철흑 같은 감옥 깊은 곳에서 두 사람은 춤을 추며 찬송했습니다.
감옥 안을 휘감아 돌던 찬송이 천장으로 올라가더니 높은 곳에 달려 있는 창문 틈새로 빠져나갔습니다.
창문을 빠져나간 찬송은 빌립보의 밤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계속되는 찬송은 이제 빌립보 하늘을 지나 대기권을 벗어나 저 높고 높은 별 너머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걱정스럽게 바울과 실라를 보시다가 조용히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한 손으로 턱을 괴시고 얼굴에 한 가득 미소를 머금으신 채 그 찬송을 음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발이 그 찬송에 맞추어 스템을 밟고 있었습니다.
찬송 소리 가 커질수록 하나님의 스탭 밟으시는 소리도 커졌습니다.
마침내 찬송이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하나님은 자기도 모르게 춤을 추시며 땅에 힘차게 스탭을 밟으셨습니다.
그러자 보좌 앞에 있던 유리 바닥에 금이 가고 갈라지더니,
그 울림이 또 다시 저 높고 높은 별을 지나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대기권을 가르고 빌립보 하늘로 내려오더니,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는 감옥의 창문 틈새로 들어와 감옥 문 앞에 쿵 하고 떨어졌습니다.
감옥에 큰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찬송으로 옥문이 열린 이유입니다.
잭 헤이포드 목사님의 이 긴장감 넘치는 묘사를 듣고 있던 수 천 명의 목회자들은 실제로 옥문이 문이 열리기라도 한듯 일제히 기립벅수를 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의 찬송이 옥문을 연 그 익숙한 이야기가 그렇게 감격이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그 감동이 몇 배로 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둠 속의 찬송’, 그것입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해답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내려다 보는 것 뿐입니다.
폭풍우가 밀려오고 폭우가 쏟아져도 먹구름 위는 찬란한 태양이 비취는 것과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찬송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신명 나게 찬송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돌아보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찬송이 들려오는데 하나님의 귀가 어떻게 번쩍 뜨이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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