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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다니엘기도회에 전한길 씨가 강사로 나섰습니다. 경북 경산의 가난한 소작농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구에서 수능강사로 12년 활동했고 34살에 가장 큰 학원을 인수해 강사와 직원 100명을 이끌었죠. 출판사도 차려 직원만 25명이 넘었죠. 승승장구하는가 싶었는데 수능체계가 EBS로 바뀌면서 학원은 3년 만에 문을 닫았고 출판사도 부도 맞았죠. 재산도 날리고 집도 월세로 돌리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습니다. 부채 정리 후 빚이 25억이 되었죠. 대부분은 그러면 생을 포기한다고 하죠. 하지만 그는 세 가지를 결단했죠. 스스로 타락시키지 않겠다, 죽어도 가정은 지키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앙의 절개는 지키겠다고 말이죠.
그 모습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빚을 갚으려고 복권을 사면서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도보다 신실하게 일해서 번 돈으로 갚기를 원하셨다는 것이죠. 더욱이 빚이 25억이라 할지라도 미래에는 합력하여 선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며 살았다는 것이죠. 그것이 오늘의 그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비결이지 않나 싶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기뻐하다’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는 히브리어로 ‘샤마흐’(שָׂמַח)인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신분에 대한 ‘자긍심’을 말하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잊지 않을 때 기뻐할 수 있죠. ‘기도하라’는 ‘프로쉬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는 ‘-을 향하다’는 ‘프로스’(πρός)와 ‘바라다’는 ‘유코마이’(εὔχομαι)의 합성어죠. 기도란 내가 소원하는 바를 바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는 바를 순종하고자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죠. ‘감사하다’는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는 히브리어로 ‘토다’(תודה)인데 감사의 대상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할 때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말리아 출신의 와리스 디리(Waris Dirie)가 쓴 〈사막의 꽃〉이 있습니다. 소말리아 출신의 그녀는 옷도 신발도 없이 맨발로 초원을 뛰어다닌 흑인 소녀였죠. 14살에 낙타 5마리로 60세 할아버지의 신부가 된다는 아버지 말에 집을 박차고 나갑니다. 사막을 건너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의 언니 집으로 갔지만 눈치보며 사는 언니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죠. 그 후 인근에 사는 숙모 집에 들어가 식모살이를 하죠. 이제 이모부가 영국대사로 가면서 그녀도 가정부로 따라나섭니다. 그로부터 4년간 아침 6시 기상, 6시반 이모부 아침식사, 7시 이모 커피, 8시 아이들 아침식사와 부엌 청소, 자정 잠잘 때까지 일만 했죠. 그 와중에 조카의 구박을 받으며 글도 익혔습니다. 이제 임기가 끝난 이모부가 소말리아로 되돌아갈 때 그녀는 그곳에 남았습니다. 불법 체류자였지만 맥도널드에서 청소와 주방보조를 하면서도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출퇴근길을 눈여겨보던 사진작가 테렌드 도노반의 눈에 띄어 패션잡지 표지모델이 되죠. 이후 파리와 밀라노 패션쇼에 출연했고 로레알 화장품 모델로 발탁되죠.
그녀는 문명사회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보며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맑은 물이 나오고 따뜻한 물을 마실 수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얼굴이 저렇게 우울할까?” 문명권 속에 사는 사람들은 환경과 상황이 너무 좋은데 그들의 정신이 나약해 있다는 것 아닐까요? 지금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이겠죠. 크리스천인 우리도 없는 걸 신경 쓰고 남과 비교하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할 때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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