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지가 바로 되어야,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가 바로 서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6장 전체에서 믿음의 내용을 다루는 1-11장까지가 7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1장까지의 믿음의 내용을 한 줄로 압축하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이죠.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거나, 구원받을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하나님의 신비스런 구원의 능력이 나를 살려주시고 세워주셨다는 것이죠. 나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구원해 주신 주님께서 날마다 내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덧입혀 주시고 계십니다. 이런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주님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바울이 로마서 12장부터 전해주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총론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서 ‘그러므로’란 말은 앞의 내용이 없다면 12장이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12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11장까지의 내용을 알아야 하죠. 11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신비스런 주님의 은총이 나를 살리셨으며 그 분의 영광이 나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12장의 내용이 비로소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2장부터는 지금까지의 분위기와 전혀 다릅니다. 11장까지는 어떠했습니까?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허물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고 바울이 말할 때 단호한 어조로 강조했죠. 그런데 12장부터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라며 부드럽게 이야기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11장까지 언급된 믿음의 내용, 복음의 교리는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수용하든 수용치 않든 상관없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타협의 여지없이 강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한 것이죠.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윤리적인 문제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모든 사람이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바르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형편없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바른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바른 삶은 절대로 야단치고 질책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부작용만 생깁니다. 무섭고 두려워서 바른 삶을 사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되지만, 그 이상은 뛰어넘지 못하죠. 오직 사랑 속에서만 바른 삶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바울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면한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1절 하반절이 이와 같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서 ‘몸’과 ‘산 제물’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죠. 제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바쳐지는 제물은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는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살아 있으면 제물이 될 수 없죠. 제물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주장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 뜻, 내 주장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 그것이 제물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한 가지 조건을 더 언급합니다.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죠. 구약의 제사는 흠 없는 제물로, 그것을 죽여서 바쳤는데, 주님은 거기에다 ‘살아 있는 제물’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삶 자체가 제물이 되고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삶이 흠 없이 정결하게 하나님 앞에서 죽어지는 삶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총체적인 대답입니다.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하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제사로 드려지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곧 영적인 예배가 되게 하라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18세기 예수회 사제인 장 피에르 코사드가 〈자기포기〉라는 책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거룩한 일인지 묻지 말고 거기 담긴 하나님의 손길을 찾으라”하고 말입니다. 매 순간 순간을 영원히 흐르는 거룩의 원천으로 삼는 것 말이죠. 왜냐하면 현재의 순간에 거룩한 성례, 거룩한 예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영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기코스’입니다. 그 뜻은 ‘분별력’을 말합니다. 바꿔 말해 ‘이성적인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삶, 곧 성령충만한 삶이란 이성이 마비된 삶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이성은 온데간데없고 감정만 충만한 그런 삶이 아니죠. 영적인 예배는 이성이 주인이 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이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요, 온 이성을 다해 삶 속에서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것, 삶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본문 2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이성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영적 예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죠. ‘이 세대’란 이 세상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죠. 변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죠. 마음을 바꿔 먹는 것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변화라는 것은 겉모습이 바뀌는 ‘change’를 넘어 근본 본질이 바뀌는 ‘transformation’을 의미합니다. 안팎으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삶입니다.
바로 그런 세 가지 삶을 하나님께 기뻐받으시는 영적 예배요, 그런 세 가지 이성을 갖고 살아가는 삶을 기뻐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바울이 참수형 당했던 터에 성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 지명이 ‘트레 폰타나’입니다.‘트레’란 ‘셋’을 뜻하고 ‘폰타나’는 ‘샘’을 말합니다. 목포에 폰타나비치호텔이 있는데, 그 ‘폰타나’가 ‘샘’ 곧 ‘강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곳 트레 폰타나는 사형 집행관이 바울의 목을 쳤더니 그 목이 바닥에 세 번 튀었고, 튄 곳마다 샘물이 솟아났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바울이 참수당할 때 사용된 돌기둥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 튀었다고 하는 그곳에 세 개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죠. 바울이 그곳에서 죽었는지, 목이 세 번 튀었는지는,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십중팔구, 전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겠죠. 하지만 로마 어디에선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참수당한 바울의 실제 삶의 자욱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 성당 안에 들어가면 성당 옆에 조각판 하나가 붙어 있는데, 그 조각판이란 로마 군인들이 돌에 묶인 바울의 목을 칼로 치는 장면인데,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 조각판에 새겨진 바울의 표정이 얼마나 생생한지, 그 눈동자를 보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이 찡할 정도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그 세대를 본받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 당시의 세상 흐름을 좇고 세상을 본받았다면 절대로 진리를 위해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 이성을 다해 그 세대를 본받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매일매일 살아갔던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어떻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지 눈에 선하게 다가옵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바울처럼, 이 세상 풍조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말씀의 이슬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롬12:9-21) (2) | 2024.10.20 |
---|---|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롬12:3-8) (0) | 2024.10.20 |
이 신비를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롬11:25-32) (0) | 2024.10.20 |
접붙임을 받았으니(롬11:13-24) (2) | 2024.10.20 |
은혜로 택함을 따라 남은 자(롬11:1-12) (0) | 2024.10.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