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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믿음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역사가 모두에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이었죠. 이방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부요한 은총을 누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는 그들에게도 멋진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본 것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봉사, 직분, 일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세속적인 의미로는 ‘직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일이자 업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업을 영광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긍지를 가진 것이었죠.
그 이유가 14절에 있습니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 일을 통해 자신의 민족 중에서 누군가가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긍지를 가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몇 사람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구원하려 작정하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이스라엘 가운데 질투를 느끼고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기 동족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해 주시리라는 근거로 세 가지를 듭니다. 15절에 첫 번째 근거가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이방인들과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나는 삶을 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이 패역한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져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 가운데서 살려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16절 상반절에 두 번째 근거를 제시합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출애굽기 23장을 보면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첫째 것은 제일 귀중하고 소중한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나머지 전부가 거룩해진다는 것이 제사의 의미죠.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만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얻은 소산 전체가 첫 것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것이 되고 거룩한 것으로 승화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바칠 때 이삭 한 명반 바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첫 것이요 이삭을 통해 태어날 수많은 자손들까지도 바쳤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손도 하나님께서 분명코 구원시켜줄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말로도 성이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16절 하반절에 세 번째 근거를 제시합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의인인 노아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지 중에 어떤 가지는 꼭 가시나무 가지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가지는 이방인처럼 보였고, 어떤 가지는 이방인보다 더 못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노아요 아브라함인 이상, 그 가지는 이스라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은 것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여기에서 ‘꺾어진 가지’는 누구이고, 또 돌감람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꺾어진 가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함으로 구원에서 벗어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돌감람나무”는 로마서를 받게 되는 그리스도인들, 곧 오늘날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접붙임 받아,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 곧 믿음의 자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자신이 으스대면서 이스라엘을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죠. 본문 18절에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가지들’이란 꺾어진 가지들입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지려면 어떤 가지든 꺾어져야 하죠. 돌감람나무는 참감람나무 가지가 꺾어진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그 자리에서 떨어진 가지를 보고서 ‘너 참 형편없구나, 어쩌다 그런 신세가 됐냐?’하고 우쭐댈 수 있냐는 것이죠.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을 통해 교만치 말라고 말합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높은 마음’이란 교만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것에 대해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되, 절대로 교만치 말라는 것이죠.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살라고 권면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왜 우리의 구원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왜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본문 22절에서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의 준엄하심이란 곧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찍혀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주님의 길을 좇아 살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때 열매를 맺을 때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엄위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언제나 하나님 아래에 거하는 나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의 자리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어야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본문 23-24절에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먼저 나온 ‘그들’은 꺾어진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믿지 않았던 탓으로 꺾어진 그들이 믿게 된다면 그들도 접붙임을 받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본래 붙어 있던 가지들, 곧 이스라엘이 다시 접붙임 받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핍박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수용하는 주님의 도구가 될 때, 바로 그것이 참된 겸손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어입니까? 접붙임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인생은 접붙임을 하거나 접붙임 당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접붙임 받으며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것이죠. 부모자식 간에도, 친구지간에도, 직장의 동료나 상하관계에서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그런 접붙임을 다른 말로 하면 희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이죠. 이스라엘의 꺾어짐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부모의 희생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내가 영생의 자녀가 된 것이고요.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위한 접붙임의 존재로, 누군가를 위한 희생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은혜 안에 거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인생은 접붙임의 삶이자 희생 속에서 살아가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부모의 희생,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속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사오니, 이제부터 나도 누군가를 위해 주님 안에서 접붙여주고 희생할 수 있는 은혜 속에 거하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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