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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잘 나고 똑똑하고 능력이 있고 다른 민족보다 월등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장 별 볼 일 없는 민족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긍휼을 베풀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주시고, 홍해를 갈라서 길을 열어 주시고, 만나를 먹여 주시고, 불기둥 구름으로 인도해 주시고,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이시면서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복음 전하는 사람들조차 핍박하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버리셨느냐? 바울은 본문 1절을 통해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바울이 이런 질문으로 본문을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10장의 앞 단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순종,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맥락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던진 이 질문을 조금 더 풀어서 이해하자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정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정답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 장치인 셈입니다. 당연히 질문에 대한 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른바 엘리야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근거는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구약성경 전체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바울이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2-3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2절에 나오는 ‘고발하다’는 단어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고발하다’의 의미는 ‘일러 바친다’는 의미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변호하다’, ‘중재하다’는 법정 용어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을 손에 쥔 우상숭배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거룩한 제단들을 헐어버리고, 이제 엘리야의 목숨마저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이 처참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엘리야의 절박한 심정이 혹시 느껴지십니까? 바로 그 심정이 지금 바울의 심정과 같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1절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바울은 9장에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동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바울의 심정은 마치 오랫동안 꼭꼭 숨겨둔 내면의 깊은 아픔을 드러내는 듯한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누구나 인정하는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이방인 사역을 위해 바울은 자신의 이름마저도 ‘샤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 대신 ‘파울로스’라는 헬라식 이름을 쓸 정도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은 자신이 가는 곳곳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숱한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복음의 소중한 열매들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한 성취와 승리를 열매로 거두어들일수록 바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고통과 아픔이 점점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신이 받았던 숱한 고난과 환난의 대부분은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돌아선 것도 끊임없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훼방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탄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9장 3절에서 이런 탄식어린 고백까지 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토록 바울은 자기 골육 곧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깊은 슬픔과 탄식 속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이 가장 크게 흥왕했던 시절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였습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 통일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분열된 이스라엘은 쇠락을 거듭하다가 결국 국호마저 역사에서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러한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지켜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남은 자’를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들을 남겨두셨고, 심지어 이방인들의 발아래 짓밟혀 나라가 멸망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마저 우둔해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둔해진 것에 대한 반사작용 덕분이었습니다. 바울이 탄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딜레마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수록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움과 탄식 또한 더 커지고 깊어졌습니다.
그 깊은 탄식과 슬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곧 자신의 동족을 위해 하나님께 호소하는 바울의 결론이 이렇습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바울은 그날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스라엘이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그날 말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그날을 바울은 소망하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자신의 동족을 향한 바울의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깊은 탄식과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죠. 내 가정 식구들, 내 골육과 친인척들, 그리고 일터의 동료들을 비록해 내가 평소 알고 지내는 그 누구든지 간에, 그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혜 임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가는 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자기 동족에 대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 소망의 끊을 놓치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의롭게 여겨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저희가 잘나고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님을 압니다. 부족하여 연약한 저희들을 오직 주님께서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긍휼과 사랑의 은혜를 받은 자처럼 나의 골육과 친척과 일터의 동료들과 그 누군가 내가 아는 이들에게 주님의 구원이 임할 수 있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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