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바울이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 성읍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교회가 태동될 수 있게 했죠. 이후 빌립보에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150km 떨어진 데살로니가 성읍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데, 야손의 집을 거처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게 되었죠. 하지만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고발하고 또 야손과 몇 몇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하자 바울은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96km떨어진 베뢰아 성읍으로 내려왔죠 그곳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죠. 그로 인해 그 성읍의 높은 헬라 여자들과 남자들이 주님을 많이 믿게 되었죠. 하지만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을 고발코자 했떤 그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 난동을 부리고 성읍을 소란케 하는 문제가 발생했죠.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주님의 형제들이 실라와 디모데는 남겨 두고 바울만 배를 태워 약 320km 떨어진 아덴, 지금의 아테네로 가게 했죠.
실라와 디모데가 이제 곧 마게도냐에서 자신이 있는 아테네에 오기를 기다리면서 바라본 아테네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서양의 민주주의와 철학의 발상지로서 지성의 도시, 철학의 도시, 문화의 도시였죠. 하지만 바울의 눈에는 그 모든 지성과 철학과 문화의 도시가 한낱 우상의 도시로 비칠 뿐이었죠.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성령께서 격분케 하는 그 마음을 따라 회당과 ‘시장’ 곧 ‘아고라’ 다시 말해 ‘광장’에 나가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죠. 이른바 철학을 통해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에피쿠로스 학파 또 인간의 고행과 선행을 통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스토아 학파였는데, 바울은 그런 철학과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얻을 수 없다고 논쟁을 폈죠. 새로운 철학과 같은 그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아고라’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이자 아크로폴리스의 중심부인 판테온 신전에서 300m 떨어진 연설과 토론의 장소 ‘아레오바고’로 바울을 데리고 갔죠. 그곳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의 연설 곧 복음의 설교를 전했죠. “당신들은 범사에 종교심 많은 사람들이다”하면서 추켜 세웠죠. 하지만 “당신들 가운데에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새겨진 단을 만들어서 섬기고 있다”면서 그야말로 엉뚱하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죠.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고”, “당신들처럼 인간이 지은 신전 안에 갇혀 계신 분이 결코 아니고” 그렇기에 “무언가 부족하여 사람의 손으로 대접받고 싶어하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시는 분”이고, 그렇기에 너희들이 섬기는 신들의 조형물처럼 “금이나 은이나 돌로 빚어서 섬기도록 하는 분이 결코 아니다”고 설교하죠. 그래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셨지만 이제는 각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길 명하셨고, 그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부활케 하신 그 증거도 주셨다”고 증거했죠. 그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바울의 말을 조롱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바울의 말을 다시 듣겠다고 했는데,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죠.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선교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바울은 그곳 아테네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고린도 시로 옮겨갑니다.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좁고 잘록한 땅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곳입니다. 지금은 바울 시대의 구고린도는 폐허가 돼 있고, 신고린도는 아테네에서 1시간가량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 고린도는 남북과 동서를 이어주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라 막대한 부를 누렸고, 거기에 걸맞은 향락과 사치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더욱이 해발 575m에 ‘아크로폴리스’ 성채가 세워졌는데, 그 중심에 ‘아프로디테’ 신전 곧 비너스 신전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신전에서 섬기는 여사제의 수만 해도 1천 여명에 달했는데, 그녀들은 낮에는 신전에서 봉사하고 밤에는 고린도 시내려 내려와 매음을 했습니다. 그만큼 고린도는 잡신과 우상과 음행과 타락과 사치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바로 그런 고린도에 바울이 들어갔는데, 본문 2절에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바울은 그곳에서 전혀 뜻밖의 동역자를 만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부부가 그들이죠. 그들은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그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고, 그 추방령 때문에 그 부부가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먼저 와서 정착했던 것이죠. 그 부부는 바울처럼 천막 제조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예비된 동역자를 만나게 될지 바울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마치 루스드라에서 젊은 제자 디모데를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그 부부의 집에 거주하면서 주중에는 천막을 만들었고, 안식일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그때의 일을 떠올리던 바울이 로마서 16장 3-4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그만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 생명과도 같은 동역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본문 5절에서는 이제 “실라와 디모데”까지도 마게도냐로에서 고린도로 내려온 상황입니다. 그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테네에서는 너무나도 쓸쓸하고 고독했는데, 지금 고린도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본문 6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이른바 이전의 데살로니가 지역의 유대인들처럼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대적하고 비방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죠. 그리고는 7절 말씀처럼 곧장 “하나님을 섬기는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본문 8절 말씀처럼 유대인의 “회당장인 그리스도”가 온 집안 식구들과 더불어 주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 다시 말해 유대인이 아닌 헬라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세례받는 일이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그때 밤에 환상가운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합니다. “이 성읍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도 침묵하지도 말고,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이죠. 네가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듣고 주님 앞에 나올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하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1년 6개월간 그곳에 머문 것입니다. 그렇게 1년 6개월이 지나갈 무렵에 일이 터집니다. 본문 12절 말씀처럼 고린도시가 소속된 아가야에 새총독 갈리오가 임명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법정에 세우고 다툽니다. 그때 갈리오는 너희 법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며 자신은 개입치 않겠다고 하죠. 그래서 바울을 법정에서 쫓아내죠. 그러자 그들은 바울 대신에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때립니다. 그때도 갈리오 총독은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런 소동과 난리를 지켜보던 바울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형제들과 이제 작별하고, 떠나게 되죠. 물론 그 1년6개월간 머물면서 이곳에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써보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팀플레이가 중요한 스포츠 종목 중의 하나는 축구입니다. 축구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선수가 있다 할지라도 그 선수를 받쳐주는 조직력이 없다면 그 선수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이죠. 바울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죠. 위대한 교회는 위대한 동역자들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 나라에 아름다운 동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행18:18-28) (3) | 2024.08.27 |
---|---|
2024년 8월 27일 사도행전17장 3분말씀_믿음의 선한 싸움과 상급 (0) | 2024.08.26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간과하셨지만(행17:10-34) (0) | 2024.08.26 |
야손과 및 형제들을 끌고(행17:1-9) (0) | 2024.08.22 |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11-40) (0) | 2024.08.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