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속해서 남왕국 유다의 13번째 왕 히스기야를 협박하고, 겁주는 앗수르의 대왕 산헤립과 그 신하 랍사게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애굽과 함께 세계 당대의 양대산맥으로 거대 제국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초라한 남왕국 유다는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약소 국가로 전락한 상태요, 당연히 주변국은 물론 앗수르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앗수르 대왕이 랍사게 장군의 입술을 통해 히스기야 왕과 그 밑의 신하들 그리고 온백성들을 협박하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구해준다는 말을 믿지 말라, 이제까지 앗수르 앞에 굴복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히스기야의 거짓말을 믿지 말라,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자기들의 신을 의지하다가 저렇게 폐허가 되고 쑥대밭이 된 것을 너희가 보고 있지 않느냐.’하고 말하는 것이죠.
사실은 그랬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말발굽과 병거, 칼과 방패 앞에 쓰러지지 않은 나라가 없었고, 복속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바벨론도, 그 옆의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들라살에 있는 에덴 족속도, 그리고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성의 왕과 헤나와 아와의 왕들도 다 무너지고, 약탈당하고, 패망하고 말았죠. 그래서 남왕국 왕 히스기야도, 또 신하들도, 그리고 온 백성들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고,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실은 이와 다르지 않죠. 세상은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목적으로 살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협박들을 해 옵니다. 세상의 누가 그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으며, 누가 이 세상의 비정하고 무서운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있겠냐고 소리치죠. 거기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무용지물이라고, 헛된 일일 수밖에 없다고 세상은 우리를 세뇌시키려하고, 신앙의 가치관을 고착화시키고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죠. 그것이 앗수르의 대왕 산헤립이 남왕국 유다 백성들, 곧 신앙심을 갖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선전포고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것이 실은 엊그제 읽은 열왕기하 18장 30-31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앗수르의 산헤립 대왕은 자기를 믿으면, 자기에게 항복하면 먹고 살 길을 제시해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마치 신앙심을 내 팽개치고 세상에 눈이 보이는 길을 취하면 모두가 넉넉하게 살 수 있다고 유혹하는 것과 똑같은 격이죠. 한 마디로 하나님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히스기야도, 그 신하들도, 그리고 유다 모든 백성들도 죽을 것 같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힘있고 능력 있는 앗수르에게 항복하고 나가면 그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것 같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예루살렘 성읍에 갇혀 완전히 몰살당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히스기야는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앗수르의 대왕 산헤립이 립나로 가서 싸운 것을 알고, 그 부하 장수 랍사게도 산헤립 왕을 돕고자 그 전투 현장에 갔는데, 그곳에서 싸우고 있는 산헤립은 사신을 보내,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항복하도록 서신을 보냈죠. 이때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자세를 갖췄습니다.
과연 히스기야의 자세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자 한 게 무엇입니까? 세상이 나를 포위하고, 나를 죽이고자 할 때 그 죽음 가운데 내 버려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고 기도를 하죠. 그런데 그때 무슨 기도를 드리는가? 정말로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무슨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는 히스기야는 그래서 무엇을 했을까요? 앗수르 대왕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면 죽이도록 내 버려두는 것, 바로 그 가운데 내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이 가운데 다시금 살아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겠구나,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그 모든 상황을 전적으로 의탁한 것입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죽기 위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히스기야로서는 항복을 해도, 북이스라엘처럼 완전히 앗수르 제국이 쓸어버릴 것이고, 맞서서 싸운다고 해도 크나큰 피해를 겪다가 완전히 멸망당할 게 뻔하니까, 그저 죽음 가운데 내 맡기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기도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기도는 매우 무기력한 방법입니다. 구체적인 기술이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방법과 힘으로 세상의 힘과 방법을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죽이겠다고 덤비고 달려드는데 어찌 그런 세상의 방법에 맞서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죽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세상의 목적과 세상의 방법에 이길 수 있고, 맞설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참 많죠. 그러나 그것은 뭔가 자기 힘과 능력이 있을 때 찾는 기도요, 아무런 소망도, 능력도, 힘도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는 그저 내어 맡기는 것 밖에 달리 할 길이 없습니다.
히스기야가 취한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죽음 가운데 내어 맡겼던 것입니다. 나의 죽음 가운데 죽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 가운데 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산헤립이 나를 취하고자 한다면 그 뜻도 하나님의 뜻이니, 내어 맡길 뿐이다, 하면서 전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포기하는 상황입니다. 한 다미로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산헤립에게 자기 자신의 죽음을 내 놓는 것이죠.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산헤립의 멸망을 말씀하시죠.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 20-37절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히스기야가 죽고자 하니까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는 것, 죽이고자 하는 산헤립은 죽이시고, 죽고자 하는 히스기야는 살려주시는 것,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는 고백입니다. 특별히 28절에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앗수르의 대왕 산헤립의 오만방자한 그를 하나님의 갈고리로 코에 꿰고 재갈을 물려 그가 오던 길로 끌어가겠다고 말씀하시죠. 대신에 30-31절에서는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유다 족속은 그 죽음 가운데 다시금 살려주시고,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게 하겠다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 나온 일임을 알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35-37절의 말씀에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그토록 의기양양하던 앗수르 대군 18만5천명은 예루살렘 성읍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하나님의 천군 천사를 통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 시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장 산헤립 대왕은 자기 고국 니느웨 성읍으로 되돌아갔는데, 그곳의 신복들의 칼에 맞에 최후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를 통해 깨닫는 음성이 있죠? 우리가 세상 방식으로 취하면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을 목적을 좇아 죽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과 당신의 열심히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살리신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깨우치는 십자가의 진리죠
*사랑하는 주님.
세상의 공격과 협박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생존키 위해 타협하지 않고,
오직 우리 생명과 영혼을 다스리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고 살게 하시옵소서.
야긴의 하나님, 보아스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들을 죽음 가운데 부활시키시는 능력을 맛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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