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바울 일행이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바울은 해안 도시의 도특한 기후로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죠. 그래도 바울은 그 몸을 이끌고 비시디아 안디옥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곳으로 가려면 험난한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야만 했죠. 그때 요한 마가는 바울의 지치고 병든 몸을 보고서, 또한 험난한 타우로스 산맥을 보고서, 그만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그 길목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타우로스 산맥을 넘었고, 드디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정통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리고 이방인 가운데 유대인들의 할레와 음식법을 지켜 유대인으로 인정해 준 그 이방인들을 향해서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 예언된 바로 그분이라는 것, 그러나 그 구원자요 메시아로 오셨어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 더욱이 유대인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 분을 부활시키셨다는 것, 그리고 그 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죄사함의 권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부어주신다는 복된 소식 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때 이후의 일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그 일행이 전한 복음을 들은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고 전해 줍니까? 본문 42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비디시아 안디옥의 회당에 모인 정통 유대인들과 이방인 가운데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바울 일행이 설교를 마치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다음 주 안식일에도 그 말씀을 더 해 주라고 요청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요청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파라칼레오’를 본문에서는 미완료 과거형인 ‘파레칼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요청은 거듭거듭 간청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바울 일행을 향해 다음 안식일에도 그 말씀을 나눠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본문 4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당의 모임이 흩어진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들은 태생적으로 유대인들과 또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던 사람들이고, 비록 태생은 유대인이 아니지만 후에 유대교에 입문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왜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고 싶어했던 것이었겠습니까? 당시 유대 회당에서 전해지던 설교들은 대부분 구약성경의 일부 내용이거나 유대인들의 전승을 혼합한 설교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인본적인 인간의 행위를 강조한 설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과 의미는 상실한 채 인간적인 행위와 규정에만 더 민감했던 설교였겠죠.
그런 설교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괴롭기 그지없었던 것이죠. 하나님을 팔짱을 낀 심판자의 입장만 보게 하는 것이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116349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적인 설교는 달랐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 역사의 초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정점을 이루고자 십자가를 지셨다고 전한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여 도리어 그 아들을 죽인 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구약의 예언된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살리셨다고 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그 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새롭게 살 수 있는 영생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말씀을 바울이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이들이 누구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모든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는 새로운 율법해석을 그들에게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그곳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여태껏 자신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배웠고 믿어왔는데, 더욱이 그 율법을 지키는 것조차 온전하게 못 지켜 늘 죄인이 된 심정으로 살았는데, 바울이 전한 그 생명의 복음은 율법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니, 뭔가 뻥 뚫린 자유의 기쁨을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실수에 체벌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의 실수를 구원으로 바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안식일에도 그와 같은 복음을 전해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복음에 감격한 사람들로 인해 다음 안식일이 되자,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복음의 선포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본문 44-45절입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복음을 전한 결과가 그렇게 극명하게 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듣고서 기뻐하던 사람들과 전혀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사람들이 그것이었습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05321
그런데 바울 일행에게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은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말 ‘시기’로 번역된 헬라어 ‘젤로스’는 냄비나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것처럼 마음에 열심, 열정이 넘쳐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부정적 의미로는 경쟁, 다툼, 시기 등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품은 시기심의 마음은 부정적으로 표현되어 바울 일행을 반박하고 비방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진정한 평화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먹잇감을 사냥하는 짐승의 살기처럼 그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하고 위협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작심하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본문 46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시기와 비방 앞에 담대했습니다. 왜죠? 복음에는 놀라운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선교현장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과 난관 앞에서도 주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붙잡아 주심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더 이상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 비시디아 안디옥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더욱 거세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동남쪽으로 약 125km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도 어떤 박해와 환난이 닥쳐올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바울 일행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서도 당신의 은혜로 붙잡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을 당신의 은혜의 손길로 붙잡아 주실 줄 믿습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05319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함이라(행14:1-28) (0) | 2024.08.18 |
---|---|
2024년 8월 19일 사도행전 13장 3분 말씀_어떤 박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된다 (0) | 2024.08.18 |
2024년 8월 16일 사도행전 13장 3분설교_고향도 출신도 신분도 사는 환경도 다르지만 하나의 몸된 교회 (0) | 2024.08.15 |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13:13-41) (0) | 2024.08.15 |
2024년 8월 15일 사도행전12장 3분 말씀_벌레 만도 못한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0) | 2024.08.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