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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특징은 유무상통의 삶이었습니다. 있는 자는 있는 대로, 또 없는 자는 없는 대로, 사도들의 발 앞에 곧 교회 앞에 자신들의 것을 있는 것만큼 가지고 와서, 가난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레위인과 같은 자들에게 나누며 살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단 사이비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강제적인 것이나 협박으로 한 일이 아니라, 자발적인 감동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중에 유독 바나바의 이름을 거명한 것은 그가 훗날 사도 바울이 될 사울을 위한 주님의 예비하신 날개, 주님의 보호하심과 감싸주심의 은혜의 날개가 되었던 까닭이었죠.
그런데 그와는 다른 삶을 산 이도 있었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들이었죠. 그들도 바나바처럼 땅을 팔아 일부를 사도들의 발 앞에, 곧 교회 앞에 가지고 나왔죠. 사도들의 강요나 억압이 아니라 자발적인 감동에 의한 일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땅 값 일부를 숨긴 채 전부인양 가지고 나왔고, 급기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거두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 자체보다도 사람의 심령 자체를 원하시는 분인데,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그 심령은 심령으로서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성령의 역사가 사도들을 통해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고 있고, 대신에 사도들이 박해를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사도들의 손을 통해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죠. 그것은 단순한 사도들의 손이 아니죠. 마치 40년 동안 하반신마비 증세로 앉은뱅이로 지내던 그 걸인을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의 손을 통해 역사하신 주님의 손과 같은 격이죠.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귀신을 좇아내고, 병든 자를 고칠 때 주님의 손으로 만질 때 그때 역사한 그 손길로 지금 사도들의 손을 통해 역사하신 것이죠.
그 일을 통해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게 된 것이죠. 물론 그런 사도들이 전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 역사에 대해 믿지 않는 자들, 아직도 자기 힘과 자기 능력만 의지하는 자들은 믿음의 사람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과 달리, 주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날로 늘어났습니다. 본문 14-15절의 현대인의성경이 이렇게 증언해줍니다.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갔으면 하였다.” 왜 그들이 주님을 믿겠다는 것입니까? 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겠다고 나오는 것입니까?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죠. 그 까닭에 병든 자들까지 메거나 들것에 눕혀서 사도들이 지나갈 때 그림자라도 스쳐지나갈 것을 바라는 심정으로 나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그림자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주님의 그림자요, 곧 주님의 날개 아래 나오려는 심정과 같은 모습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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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곧 주님의 날개 아래 데리고 나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신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죠. 본문 17절입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의 당파는 소위 백성들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동력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이었습니다. 시기심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부러움과 동시에 시기심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죠.
그런데 헬라어 명사 ‘젤로스’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시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열심’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 열심히 선한 뜻으로 쓰이면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한 촉매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9장 1-2절에 쓴 편지 내용 가운데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연보하여 돕고자 하는 그 열심이 다른 지역의 성도들의 열심을 이끌어냈다는 뜻입니다. 그 성도들의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가 바로 ‘젤로스’입니다.
그런데 그 열정, 그 시기심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폭력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 무리들이 그러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이후 예루살렘은 성령 충만의 역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일자무식한 어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루에 3,000명 이상 되는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겠다며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원하여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려는 손길이 줄을 이었고,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당시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수많은 병자들, 귀신들린 사람들이 와서 나음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런 신드롬과 같은 현상에 대해 대제사장 무리들의 반응은 시기심을 넘어 폭력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곧장 사도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19절에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시더니”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을 주의 천사가 옥문을 열어줬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한 것이죠.
그렇게 순종해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대제사장 무리들은 다시금 그들을 체포해 산헤드린 법정에 세우죠. 그러면서 2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이른바 사도행전 4장 18절의 말씀을 꺼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데도 왜 다시 나가서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선동하는 것이냐, 하는 상황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은 사도행전 4장 20절의 말씀과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본문 29절에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그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전하죠. 너희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으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그들은 그 사도들을 없애려고 일어나려고 하죠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일어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가말리엘이 그였죠. 그는 드다라는 사람의 예를 들어줍니다. 그가 선동을 일으킬 때 400명의 사람들이 따랐는데, 그가 망하자 그를 따르는 자들이 다 사라지지 않았느냐. 지금 사도들이 일으키는 선동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면 머잖아 사라질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역사라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그러자 본문 40절 말씀처럼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풀어주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예수님은 구원자라고, 가르치고 전하는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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