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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이 유대 당국에 붙잡혔다가 풀려났습니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풀려났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법정을 빠져나왔죠. 그리고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함께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신들은 티끌과 재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하면서 기도를 했죠. 그런데 그들의 기도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핍박자들, 그 유대 당국자들의 핍박을 없애달라거나, 그들을 멸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의 능력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고난과 핍박 앞에서도 담대하게 꿰뚫고 나갈 힘과 능력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곧 성령충만한 모습이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어찌하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 까닭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4장 32-37절 말씀은 초대교회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2절 말씀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 함께 통용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믿기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34절 말씀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왜 그들 중에 가난한 이들이 없었습니까?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가진 자들 중에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에 가져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성도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 많은 게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소유 가운데 여유가 있는 이들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죠. 그런데 유독 한 사람의 이름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 36절에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구브로 출신의 요셉이란 사람도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온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별명이 ‘위로의 아들’ 곧 바나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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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그의 이름만 유독 밝혀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가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내놓았기 때문일까요? 그랬다면 그 액수까지 밝혔겠죠. 그 액수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볼 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이 후에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장면이죠. 그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거꾸러지고, 3일 뒤에 주님의 제자로 거듭납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를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죠. 그때 바울은 다메섹 성읍을 빠져나가 아라비아 광야로 3년간 경건훈련을 거치죠. 그 뒤 예루살렘에 와서 주님의 도를 전합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바울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려고 위장한 자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의 신원을 보증해 준 이가 본문의 요셉, 곧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뒤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때 바울이 고향 다소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준 이가 바나바였습니다. 더욱이 후에 안디옥의 공동담임목회자로 바울을 부른 인물도, 그 뒤에 바울과 함께 선교행렬의 선장으로 나선 이가 바로 그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바나바의 이름은 거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머잖아 주님의 일꾼이 될 바울을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일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들도 머잖아 누군가 주님의 일꾼이 될 그를 위한 바나바로, 주님의 예비하심으로 살도록 우리를 먼저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5장 1-11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은 부부였고 초대교회의 성도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인 땅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지고 올 정도로, 다시 말해 교회 앞에 헌금할 정도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땅 값 일부만 내놓고서 전부를 내놓았다고 거짓말 했고, 그로 인해 한날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나도 혹시 거짓말을 했다가 죽임을 당하는 건 아니야, 하는 두려움을 가질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거짓말 하면 생명을 잃는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1-3절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두 사람이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3절은 그것이 땅을 판 값임을 알려줍니다. 아나니아는 그 땅 값을 받아 일부만 사도들의 발 앞에 가지고 나왔는데, 땅 값 전부라고 속였던 것이죠.
여기서 궁금한 게 생깁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땅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그렇게 팔아서 교회에 바쳐야만 했을까요? 다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아나니아도 그렇게까지 하면서 속이려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라고 해서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았던 게 아니죠. 공동생산과 공동소유를 주장하는 그런 공산주의를 표방한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4절 말씀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새번역에서는 이렇습니다.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의 것이 아니었소? 또 팔린 뒤에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소?” 무슨 뜻입니까? 아나니아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바칠 마음을 먹고 땅을 팔았어도, 그 뒤에 마음이 변하면 일부나 전부라도 자기 뜻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자기 사유권을 인정하는 초대교회였지, 결코 강압에 의해 독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자기 소유를 팔아 헌금하지 않아도 누구도 탓할 사람이 없었죠.
그런데도 왜 아나니아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까?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내 보이고 싶어서 거짓말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아나니아처럼 돈이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은 인간의 삶을 편하게 할지는 몰라도 가치있는 삶 자체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가치있는 인생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때만 가능한 법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많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거짓된 자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것이죠.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믿는 생명이란, 이 세상에서 생명으로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문제는 아니니아가 그렇게 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 아내 삽비라도 똑같은 일로 죽임을 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임을 당한 사건의 전말이죠.
종종 사이비 단체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전 재산을 바치라고 협박을 합니다. 전 재산을 바치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고, 불신앙의 결말은 죽음이라고 말하면서 공포심을 심어주죠. 하지만 그런 협박이 얼마나 허황된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돈이나 물질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언젠가 썩고 사라질 것에 관심을 두시는 분이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사는 자들을 기뻐 받으시는 것이죠.
시편 51편 16-17절에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범죄를 저지른 후에 참회한 내용의 시죠.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거짓말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설령 인간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참회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상한 심령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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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런 심령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손길로 사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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