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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에 믿음으로 신앙생활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삶이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이 짊어진 짐을 가볍게 해 주길 원했습니다. 그녀는 꿈을 꿨는데 자신이 커다란 십자가를 끌고 가는 걸 봤습니다. 그때 주님께 십자가를 잘라주길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그 꿈에서 세 번씩이나 십자가를 잘라줬는데 드디어 눈앞에 요단강이 보였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로 다리를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죠. 하지만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 안에 들어올 정도로 너무나 작아서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때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7)
골로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의 가택연금에 처한 A.D.60-62년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교회는 에베소교회나 고린도교회처럼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죠.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서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 골로새 출신의 상인 에바브라가 주님을 영접해 고향 땅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집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였죠. 그런데 그 교회에 영적 혼합주의와 유대 율법주의와 황제숭배사상이 밀려들자 에바브라가 그 문제를 안고 로마의 바울에게 찾아간 것이었죠. 그때 바울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그리스도(골1:17)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골1:18)의 터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 안에 흔들리지 않도록(골1:23) 편지를 쓴 것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절)
우리말 ‘괴로움’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테마’(πάθημα)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passion)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기뻐하다’는 ‘카이로’(χαίρω)는 십자가 대속을 통해 누리는 영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이란 복음을 위해 겪는 자신의 고난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모든 고난을 십자가 흔적(갈6:17)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우리 몸에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마카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걸 봤죠. 그는 주님께 친근하게 다가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셨죠. 또다시 그가 다가가 주님께 간청했지만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걷기만 하셨죠. 그는 무척 당황했지만 끈기 있게 따라가 주님의 십자가를 원했습니다. 그때서야 주님은 그에게 몸을 돌리면서 말씀하셨죠. “아들아. 이건 내 십자가다.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그는 주님이 가리킨 지점으로 달려갔는데 자신의 십자가는 모래바닥에 나둥그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있던 그 십자가는 온 데 간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씀해 주셨죠.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짊어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나 진배 없단다.” 주님은 바울과 에바브라에게 맞는 십자가 고난을 맡겨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적합한 십자가 고난을 맡겨주신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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