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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마태복음 9장에는 3가지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2-8절을 통해 친구들이 중풍병자 한 명을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나와 고침받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거기에 서기관들이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둘째 9-13절을 통해 가버나움의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입니다. 거기에도 또 한 부류의 사람들 있었는데,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들이죠. 그리고 셋째는 14-17절을 통해 금식에 대해 중요한 신앙 전통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는지 묻는 사건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죠.
이상과 같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핵심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고, 그 속에서 주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에 대한 어리석음도 깨우쳐주는 게 본문의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말씀해 줍니다. 이 사건 속에서는 친구들이 병든 친구의 손과 발이 되어 주님 앞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그 친구들이 지붕까지 걷어내서 지붕 위에서 그 친구를 방에 내려놓기까지 하는 그 간절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데리고 갈 요량으로 지붕까지 뜯어냈던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무례하고 책망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해 주신 것이죠. 다만 주님께서는 ‘네 병이 나았다’하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치유해주시는 분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신 거죠.
그런데 이 사건을 목격한 서기관들의 반응은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편에 서는 느낌입니다. 본문 3절에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만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데, 어떻게 저 예수란 자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줄 수 있다는 것인지, 바로 그것이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율법의 전통은 잘 지켰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혹은 구세주로 모시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 4절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중풍병자가 고침받는 과정을 보면서 율법에 밝은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믿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심령 속에는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긍휼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병자나 아픈 사람이나 상처받는 사람보다도 언제나 율법을 우선시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에 갇힌 채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만큼 본문은 그들의 어리석음, 그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일깨워주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도 깊이 생각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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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본문의 사건은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 속에는 세리 곧 세금원들은 자국민을 괴롭히는 죄인처럼 취급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걷어내서 일정 부분은 로마에 납부하고, 나머지 돈은 자신들의 주머니에 모두 채워넣었기 때문에, 그런 부정축재하는 세금원들 곧 세리들을 죄다 죄인으로 대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과 식사하거나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시는가 하면, 10절에서는 마태의 집에 들어가 음식까지 함께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세리 마태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이 사건이야말로, 복음 중에 복음이지 않겠습니까? 누구도 자기 자신의 처지 때문에 함께 손잡아주지 않고 다들 비난만 하는데, 유독 예수님만은 그런 자신을 제자로 삼아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황송하면서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조롱받고, 아무리 비판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색출해서 감옥에 처넣는 앞잡이 역할을 했었죠. 그렇기에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과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에게도 주님은 찾아와주셔서 대변혁의 삶, 대변화의 삶을 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건의 본문의 세리마태에게도, 또 세리 삭개오에게도 일어났던 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사건만 전해주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보다 깊은 목적이 하나 더 숨어 있습니다. 이른바 그 자리에 함께 한 바리새인들, 곧 그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이 사건을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죠. 본문 11절에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님을 향해,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하고 있는 셈이죠. 어떻게 너희들의 선생, 곧 제자들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단 말이더냐? 하고 말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 본문 12-13절인데,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들이 죄인 취급하는 세리에게 필요한 자가 곧 나라는 것, 너희들이 병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왕따를 시키고 멀리하고 죄인취급하는, 저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나 자신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나는 너희들처럼 의롭다고 여기고 힘주는 자들 곧 교만한 자들, 외식하는 자들에게 온 게 아니라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 자들, 병들고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자들을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편협한 자기 사고방식에 갇힌 자들을 깊이 깨우쳐 주시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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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나옵니다. 그렇게 세리 마태의 집에서 먹고 마실 때, 또 한 부류의 사람들 본문 14절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논쟁을 벌인 사건입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금식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당신처럼 금식하지 않는 것인지 묻는 내용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혼인 잔치 석상에서 누가 슬퍼하며 금식할 수 있냐는 것이죠.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때면 그때는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해 옷을 낡은 조각에 덧대어서 붙이는 자가 없듯이,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듯이, 새 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한단다, 하고 깨우침을 주고 계십니다.
이것 역시 너희들의 편협한 고정관념을 깨트려야 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 가지 사건과 내용을 통해 밝혀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의 치유자가 되시고,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란 사실을 만 천하에 공표하고 있는 것이고, 그를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심지어 요한의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낡은 전통과 관습을 이제는 새 술을 담는 새 부대, 곧 새로운 사고방식을 지닌 있는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라는 뜻이죠.
혹여라도 저와 여러분들도 본문 속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관점을 지녔다면 이제부터는 사고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모든 육체 질병과 죄악까지도 고치시고 사해주시는 분이시고, 주님은 세상에 어떤 손가락질 받는 사람의 친구요 구원의 주님이실 수 있고, 그러니 그 주님을 온전히 모시는 새 가죽부대, 새로운 심령의 그릇으로 주님을 온전히 모시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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