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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랴서는 성전재건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죠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이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바벨론에 끌려와 70년 동안 살고 있는 유대 포로민들을 고국으로 귀향하도록 했고, 그때 5만명의 포로민들이 고향 유대 땅으로 이주해 들어갔는데, 그들이 2년 뒤인 B.C 536년에 성전재건을 시작했지만 방해꾼들에 의해 중단이 되고, 무려 15년 동안 멈춰 서는데, 그때 나이 70세가 넘은 학개 선지자와 나이 30대 전후의 젊은 스가랴 선지자가 나서서 성전재건을 독려했고, 급기야 B.C.515년에 완공을 했다고 했죠.
바로 그와 같은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 게 학개서와 스가랴서였죠. 며칠 전 읽은 학개서 1장의 내용은 눈에 보이는 그 이면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 백성들에게 성전재건을 독려하셨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제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신앙심을 정상화할 수 있는 곳이 성전이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그 길이 성전의 제사를 통해 서로가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학개서 1장 초반부의 말씀이었는데, 우리가 그 중 한 단어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만군의 여호와’라는 단어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호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에서 80회 이상 사용되고 있는데, 스가랴에서도 47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란 이름의 뜻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것은 곧 하나님이 ‘수 많은 왕들, 전쟁의 신들’ 중에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모든 전쟁들의 승패를 가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이죠. 그와 같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바로 스가랴에게 명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스가랴 곧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이름의 뜻을 지닌 스가랴 선지자에게 말씀하게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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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만군의 여호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 특별히 스가랴서를 통해 말씀하시는 뜻은 ‘성전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회복이 되길 바라시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인간 편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뭔가를 성취하시겠다고 한다면, 인간편에서는 그에 대한 기다림이 필요한 법이죠. 어제 읽은 1장 12절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이른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지 70년만에 백성들을 회복시켜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측량줄)이 쳐지지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0년만에 포로귀환을 이루고, 그 뒤 예루살렘에 먹줄 곧 측량줄, 성전 재건의 측량줄을 놓게 하겠다는 약속이죠.
그렇다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인간 편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자신들이 더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요 통로가 되도록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죠. 만약 초조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것, 곧 눈에 보이는 것만 선택하게 되죠.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은 믿음을 갖고 마음과 심령을 정돈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며 살게 되죠. 그래서 역사의 주관자, 그 일을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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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스가랴 2장은 예루살렘의 장광(長廣)을 재고 있는 한 사람을 스가랴가 보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여기에 나오는 ‘한 사람’ 그리고 ‘측량줄’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 건물의 길이와 넓이를 측정하는 측량줄이고, 그 측량줄로 재는 사람이란 실은 건축가요, 곧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할 하나님이심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 분의 뜻 가운데서 무너진 성전과 성읍과 성벽을 다시금 재건할 것이라는 말씀이죠.
사실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고, 70년이 지나 고레스 대왕의 칙령에 의해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인솔에 의해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졌죠. 하지만 예상보다 적은 소수의 사람들 곧 5만명의 사람들이 돌아왔기에 그들의 힘으로는 성읍과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마음은 있지만 누구도 엄두를 못 낼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하여 예루살렘이 재건될 환상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예루살렘 재건의 뜻을 보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 성읍과 성전의 재건을 주도하시는 건축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말씀이죠. 그래서 재건할 예루살렘의 모습은 이러하고, 본문 4절에서 밝혀줍니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이 성읍에 관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실 예루살렘은 사람과 가축이 많으나 성곽이 없는 성읍으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런 상상을 할 수 없던 상황이었죠.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폐허 속에서 고레스의 해방령으로 겨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맞아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은 처절하다 못해 비참한 모습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현실의 상황을 초월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꿈꾸시는 회복과 번영을 함께 보자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성곽이 없는 성읍이란 성내와 성 밖이 구분되지 않는 광활한 평원을 의미하는데, 왜 그걸 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우실 나라는 ‘누구’만의 나라가 아니라 모두의 나라이며, 그 넓이는 결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다는 뜻에서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모든 이들에게 본문 5절의 말씀처럼 불이 되어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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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두 가지 속성이 있죠. 하나는 빛입니다. 빛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죠. 어제 말씀드린 목사님도 차가 미끄러져 한 바퀴를 도는데, 차에 탄 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감싸주는 것을 느꼈다고 하죠. 제가 아내와 민주를 데리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중앙분리대를 받았는데 차가 한 바퀴 돌았습니다. 호세아도 그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총을 ‘하나님의 빛’으로 표현했죠.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빛의 또 다른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열입니다. 열은 에너지이고 힘을 의미하죠.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로 표현하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하나님이 성곽 없는 성읍의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시겠다는 말씀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고, 그 경계를 뚫지 못하는 강력한 나라를 다시금 세우시겠다는 약속이죠. 그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은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것이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임재의 뜻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바벨론이란 이방 땅에서 뿌리내리려 할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바꿔보면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살 길이요 은총과 영광의 길인데, 자기 세계관과 고집에 갇혀 있는 꼴이고, 궁극적인 사망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오늘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다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키워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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