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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다니엘서 3장은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에 관한 말씀입니다. 얼핏 보면 동화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사건은 동화가 아니라 당시의 사건이었고 실제 현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삶은 요정이 활동하는 그런 환상적인 동화가 아니죠. 우리가 반드시 넘고 극복하며 살아야 할 현실입니다. 그것은 말씀도 마찬가지죠. 말씀 또한 현실입니다. 말씀은 종교적 교리나 철학적인 기록이나 단순한 윤리적 교훈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고 내면을 만지며 인생과 역사 속에서 성취하도록 하시는 게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참된 약속과 소망을 주는 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이 복이며,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나팔과 악기 소리가 나면 금 신상에 절하라고 명령을 했죠.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맹렬한 풀무불 곧 용광로 속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상에게 절하도록 강요받는 시대입니다. 물론 바벨론 시대처럼 금 신상을 세워놓고 절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우상숭배를 강요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보이지 않는 강력한 세력이 사람들에게 현대판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있고,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 우상이 바로 ‘돈이라는 우상’, ‘외모라는 우상’, ‘권력이라는 우상’, ‘건강이라는 우상’, ‘인기라는 우상’입니다. 그것들을 숭배하게 만듭니다. 그것들에게 절대적인 가치, 최상의 가치를 두게 하며, 그것들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만족을 두게 하죠.
그런데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사람을 속이는 것이죠. 우상숭배는 단순히 보이는 형상에 절하고 경배하는 게 다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 속이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속이고, 참된 의미와 가치와 소망이 아닌 것을 참된 것이라고 속이는 게 우상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가치와 약속과 현실을 상실하게 만들죠. 우상숭배의 함정과 위험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로 오늘날의 시대는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잘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빛과 어둠이,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대 속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죠.
본문 8-23절은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에 대한 말씀입니다. 금 신상에게 절하라는 나팔소리가 났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격노한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 던져버립니다.
그 모습을 본문 16-18절에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사람이 돈에 대해, 외모나 건강과 권력에 대해, 또 인기에 대해 자유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너도나도 더 많은 돈을 모으고 가지려 하는 것이고, 외모를 뜯어고쳐 더 멋지고 예쁜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또 불나방처럼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권력을 쥐려고 하는 것이죠. 그것들이 없는 것이 곧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그런 현상들은 갈수록 심화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치우쳐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실은 곧 우상숭배의 행위와 같은 꼴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을 굳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 믿음을 지키는데 용기가 필요함은 당연한 일이죠.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천사 가브리엘이 전달했을 때, 그녀는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나이다.’하며 용기를 냈죠.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용기를 지닌 사람만이 세상 사람들이 취하는 우상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는 법이죠. 본문 속에 등장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바로 그런 믿음의 용기를 지닌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왕이 뜨거운 용광로 속에 자신들을 집어 넣어 죽인다 할지라도, 자신들은 결코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자신들이 바벨론 땅에 끌려와, 왕실의 언어와 문화와 온갖 교육을 받고, 3년 과정을 거쳐, 이제 명실상부한 바벨론의 관리직을 얻고,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그러나 그런 권력이나 명예욕보다도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포기할 내려놓을 줄 알았던 참 신앙의 용기를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백한 멋진 신앙의 고백이 있죠. 본문 18절 말씀이 바로 그 고백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바로 이 고백으로부터 그 멋진 노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하는 복음송이 나왔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꿈꾸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내가 생각한 일이 뒤틀리더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감사하며 찬송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겠다는 찬양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죠.
본문 24-30절은 풀무불 가운데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건지시고 높이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 가운데서 건지시고 높여주셨습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들어서 풀무불에 던져 넣는 그 “붙든 사람은 불에 타서 죽었다”고 밝혀주는데, 그러나 25절에서는 그들이 그 풀무불 속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천사였죠. 그래서 그 네 번째 사람의 모습을 25절 마지막 부분에서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하고 고백했던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 인생 속에 이렇게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통해 역사하실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내가 인생의 위기나 폭풍우 속에 있을 때, 환란과 풍파 속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나를 감싸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가 어려운 인생 가운데 그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고 붙들면 붙들수록,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시고 회복케 하시는 역사를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고백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고백 속에 살 때, 그래서 설령 풀무불에 던져져 죽으면 죽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신 모습을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펼쳐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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