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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질문대답BibleQ&A/출애굽기

전부 이백칠십육 명(행27:33-37)

by 권또또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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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어느 목사님이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 열심히 옥외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 마지막에 결론을 내릴 때 쯤이었죠.

어떤 불신자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목사 양반, 나는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소. 나는 그것들을 본 적이 없소이다.”

 

그러자 청중은 쥐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검은 색안경을 낀 사람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누가봐도 그 사람은 소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분이었죠.

왜냐하면 지팡이를 짚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부근에 클리이드 강이 있지만 저는 믿지 않소.”

“여기 사람들이 많이 서 있지만 저는 믿지 않소. 나는 그들을 본 적이 없소. 나는 맹인으로 태어났거든요.”

 

그러자 앞서 말한 그 불신자는 더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하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 같습니까?

영적으로 눈먼 사람은 아무런 것도 볼 수가 없다는 것이죠.

영적으로 눈먼 사람은 오직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만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나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이 세상 너머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죠.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해주시고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이죠.

 

(적용)성경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고전 2:14)

 

그만큼 이 세상을 똑같이 살아가지만 육을 좇는 사람이 있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하고 말씀하죠.

이 세상의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끝이 사망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육적인 삶을 살지라도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육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령을 좇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그레데 섬 미항을 출항한 알렉산드리아 배는 열나흘째 되는 날 한밤중이 돼서야 알지 못하는 바다에 닻을 내렸죠.

그때까지 몰아닥친 유라굴로 광풍 때문에 떠밀려온 것이었죠.

그때까지 그 배 안에 탄 사람들은 별도 달도 보지 못한 채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나서서 그들에게 음식을 먹자고 권했죠.

물론 14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그들이 선뜻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3일만 금식해도 미음을 먹어서 속을 달래야 할 판인데 14일간 굶었으니 누가 선뜻 음식을 먹으려 하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음식을 권한 것은 허기진 육신의 배를 채우자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권한 음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뜻하는 생명과 진리의 떡이었죠.

그만큼 바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당신의 살과 피를 기념하듯이, 바울도 그들에게 하늘 생명을 취하자는 뜻으로 권한 것이었죠.

 

그래서 바울이 직접 빵을 취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빵 조각을 직접 먹어보였죠.

그러자 바울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안 그들도 하나씩 빵을 떼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그때 그들은 깨닫지 않았겠습니까?

여태껏 그들이 먹고 살아 온 것은 이 세상만을 위해 먹고 마신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하늘 생명을 취하는 자세로 먹고 마시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었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리와 생명의 떡을 먹고 마시는 삶이기 때문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37절에서 이렇게 끝이 납니다.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전개)여기에 ‘우리의 수’라고 밝힌 부분에서 ‘우리’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포함해 그 배에 탄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죠.

누가는 의사 출신으로 바울이 2차전도 여행을 할 때 드로아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선교대열에 합류했죠.

그때부터 바울의 주치의로 바울과 동행한 누가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자신도 포함돼 있음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 ‘우리’라는 주어를 사용해서 밝혔죠.

 

그것은 사도행전 27장 1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나아가고자 할 때 누가는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로 가기로 작정되매”라고 밝혔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데 누가 자신도 동행했기 때문에 “우리”라고 밝힌 것이죠.

그래서 누가는 가이사랴에서 바울과 함께 아드라뭇데노 배에 탔다가 루기아의 무라시에서 바울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 탄 것이죠.

누가도 알렉산드리아 배가 유라굴로 광풍 앞에 풍랑에 휩쌓일 때, 14일간 떠밀려갈 때,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 그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함께 느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두려움 가운데서도 초로에 늙은 바울이 배 위에서 일어서서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을 목격한 누가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내가 속한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어제 밤에 천사를 보내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반드시 로마 황제 앞에 서야 할 것이고, 이 배에 탄 사람들을 너에게 맡겨주었다”고 말이죠.

“그러니 나는 반드시 한 섬에 이 배가 걸릴 것을 믿습니다.”

 

누가는 고난과 두려움 앞에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자신 보다 한 참 늙은 바울이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 앞에 놀랄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확신에 찬 선포를 하는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삶에 희망이 되살아났죠.

그리고 선원들도 두 차례에 걸쳐 물길을 재봤고 배 뒤편의 닻을 내려서 떠밀리지 않게 했죠.

더욱이 그 선원들이 거룻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지만 바울에 의해 발각돼서 무산되고 말았죠.

그리고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참 생명과 진리의 떡을 취해서 먹자고 권했죠.

물론 아무도 응하지 않았고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한 후에 직접 빵을 떼자 모두가 함께 빵을 떼면서 참 생명을 취했죠.

 

(깨달음)바로 이와 같은 광경을 누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 빵을 취한 사람들의 수를 센 것이었죠.

왜 그가 그들의 수를 셌겠습니까?

누가는 선장이나 선주도 혹은 선원도 아니기에 그 승객들의 수를 셀 필요도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가는 참 생명을 취하고자 빵을 떼어 먹은 그 사람들의 수를 일일이 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가 본문을 통해 기록한 것처럼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라고 기록한 것이죠.

 

(원해)그렇다면 왜 누가는 그 수가 전부 276명이라고 굳이 밝힌 것이겠습니까?

여기에서 276 ‘명’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당시 사람을 셀 때 사용하는 ‘안드로포스’나 ‘남자’를 칭하는 ‘아네르’가 아닙니다.

그것은 육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죠.

누가는 그런 육체와 구별된 ‘영혼’을 뜻하는 단어인 ‘프쉬케’라는 단어를 기록한 것입니다.

 

(깨달음)그렇기에 선장이나 선주나 선원도 아닌 누가가 육체와 구별된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로 276명이었다고 밝힌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죠.

누가의 관심은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276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의 육체가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걸 언급한 게 아니죠.

그 배에 탄 사람들 모두가 바울과 참 생명을 함께 취한 프쉬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태껏 육적인 삶을 살아왔던 그들이 그 과정을 통해 하늘의 참된 생명을 취하는 영혼으로 거듭났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죠.

 

(적용)사실 루기아의 무라시에서 알렉산드리아 배에 오를 때만 해도 276명 중에 참 생명을 얻은 자가 몇 명이나 됐습니까?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죽임당하셨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믿는 사람은 바울과 누가와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 그 세 명 뿐이었죠.

나머지 273명의 사람들은 모두 육체를 위해 먹고 마시는 사람들, 이 세상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육신적인 사람들이었죠.

 

그러나 그들 모두가 14일간의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죽을 줄 알았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과 함께 하늘의 생명과 진리의 떡을 떼면서부터 참 생명에 들어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로 그걸 강조하고자 자신을 포함해 참 생명의 영혼에 들어선 사람이 276명이었다고 밝힌 거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도 육신대로만 사는 자가 아니라 참 생명의 영혼에 들어선 자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 검은색 안경을 낀 소경은 클리이드 강을 못 봐도 그 강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살지 않느냐?”

바울과 함께 탄 누가와 아리스다고 외에 273명의 사람들은 유라굴로 광풍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두 육적인 것만을 좇던 사람들이지 않았더냐?”

하나님께서는 그 광풍을 통해 육적인 삶만 추구한 그들이 하늘의 참 생명을 취하는 자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는 너를 향해서도 유라굴로 광풍을 통해 너의 육적인 삶을 깨우치게 하실 때가 있지 않겠느냐?”

도저히 너의 인간적인 방법이나 육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오직 성령님의 은혜속에서 해결케 하시는 주님의 방법 말이다.”

네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도 육적인 것을 끊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너를 흔들어 깨우지 않겠느냐?”

오직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처럼 그 어떤 환란과 풍랑과 굶주림 속에서도 성령을 좇아 사는 영의 사람이 되도록 말이다.”

 

(찬양)성령 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혼 살리소서.

성령 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 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화)바울이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매듭짓고 이제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그때도 누가는 바울과 동행을 했죠.

그런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거짓으로 모함해 고발해버렸습니다.

그 일로 인해 바울은 로마군 요새의 감옥에 투옥되었죠.

 

그러자 예루살렘의 천부장 루시아는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죠.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사두개인과 바리새파로 나뉘었고 바울이 부활을 믿는다고 여기는 바리새파와 사두개인은 둘로 나뉘어 다투었죠.

그 모습을 바라본 천부장 루시아는 바울에게 특별한 죄가 없다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바울을 감옥에 가뒀는데, 그 무렵에 바울의 조카가 감옥 밖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죠.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40명의 자객단이 조직이 된 걸 말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에게 말해줬고 바울은 그 소식을 아무도 모르게 천부장 루시아에게만 말하도록 일렀죠.

 

그때 천부장 루시아가 어떻게 합니까?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보내고자 하죠.

다만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96km가 걸리는 거리로, 그 중간에 자객단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천부장 루이사는 그 밤에 2명의 백부장을 통해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 총 472명의 군인들을 동원해 바울을 호위하며 이송토록 했죠.

 

중요한 것은 그때도 누가는 사도행전 23장 23절을 통해 그들의 수를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 군인들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늘 생명을 받든 자였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죠.

바울의 목숨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죠.

한 사람의 목숨을 지키고 돌봐주시기 위해 427명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깨워주고자 말입니다.

 

427명의 로마 군인들이야말로 육적인 것만 쫓는 사람들이었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받아 성령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는데, 바울은 그 영의 생각을 좇아 순종하는 자였죠.

바로 그런 자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일을 좇는 427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영의 사람 한 사람을 지키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적용)이것은 사도행전 2장 41절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도 마찬가지죠.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 수가 3천명이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업적을 기리고자 함이었습니까?

베드로는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사람으로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의 실력으로 3천명이 회개하여 주님께 나아왔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죠.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육신을 좇아 자기 맘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을 좇아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순종하는 베드로를 통해 주님께서는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를 베풀어주셨던 것이죠.

그때까지 육신적인 것을 좇아 살아온 3천명의 사람들도 바로 그 무렵에 하늘 생명에 들어서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기도)어떻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성령을 좇아 순종하여 살아가는 바울 한 사람을 지켜주시기 위해 육신을 좇아 사는 군인 427명을 통해 지켜주시네요.”

무식한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성령의 소욕을 좇아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육신을 좇아 살아온 3천명의 사람들이 영생의 문턱에 들어서는 은혜를 덧입게 되었네요.”

주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며 믿는 저도 육신대로 살다가 육신대로 죽을 게 아니라 성령을 좇아 살게 하시고 성령을 좇아 사는 저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주시옵소서.”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육신의 소욕은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더욱 좇아 살게 하셔서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누가처럼 주님나라를 위해 쓰임받게 해 주세요.”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의 소육을 좇아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찬양)성령 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혼 살리소서.

성령 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 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똑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 같지만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뉘어 살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아 사는 인간과 성령을 좇아 사는 인간 말이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좇아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을 끝으로 여기며 살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영생의 나라 천국을 소망하며 산느 자들인 줄 믿습니다.

 

육신의 소욕만을 좇아 사는 자들은 그 끝이 지옥형벌로 끝나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순종하는 자녀들에게는 생명과 평강이 뒤따른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에 탄 273명의 사람들이 성령에 순종하여 하는 바울을 따라 하늘의 떡을 취할 때 영생의 문턱에 들어서는 놀라운 은혜를 덧입었죠.

배운 게 하나도 없지만 성령의 소욕에 순종한 베드로를 통해 육적인 삶만 좇아 온 3천명의 사람들도 영생의 문턱에 들어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육신의 생각보다 성령의 생각에 사로잡혀 살 수 있도록, 그리하여 바울과 베드로처럼 놀라운 새 생명의 도구로 쓰임받는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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