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예화)목포 여객선 터미널 근처에 있는 ‘컴포즈 커피’점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키오스크 곧 ‘간편주문대’에서 커피를 시켜 먹은 적이 있죠.
그 후에 ‘이태리 반점’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서빙 로봇이 그 음식을 갖다 준 적이 있습니다.
로봇이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위신콘신주 대법원에서는 AI알고리즘으로 설계된 인공지능 로봇 판사 ‘컴퍼스’(compas)가 등장했다고 하죠.
당시 형사 재판을 진행했는데 피고인에 대해 로봇 판사 컴퍼스가 중형을 선고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지방법원은 그 판결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판사도 설 자리가 없어질 수 있는 것이죠.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의료계에서는 IBM이 개발한 ‘왓슨의사가’ 수술을 하고 있고, 변호사도 인공지능로봇 변호사 ‘로스’(ROSS)가 활약하고 있죠.
음식을 만드는 로봇도 나와 있고, 간단한 전화상담도 로봇이 주도하고 있죠.
ChatGPT가 나와서 신문지면도 그것이 대신 써주고 있고, 대학교 시험문제도 그걸 통해 답안을 작성하는 형국이죠.
신문을 보니까 생성형 AI가 일반업무에 뛰어들면 인간의 일자리가 3억개나 위태해진다고 하죠.
(깨달음)그런데 로봇이 재태크를 알려주고 의술와 법률까지 자문해줄지라도, 불가능한 게 있지 않겠습니까?
AI타임즈라는 인터넷 신문에서 그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게 있었죠.
AI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이 갖춰야 할 것이 크게 세 가지라는 겁니다.
환대와 관리와 창의성입니다.
환대란 무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고객과 말을 나눌 때 AI로봇처럼 사무적으로 하는 게 따뜻한 감정으로 공감하면서 고객의 불편을 해결코자 하는 것이죠.
관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AI로봇은 조직원이 능력이 없거나 성장하지 못하거나 곤경에 처하면 효율성 때문에 자르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관리 능력이 뛰어난 상급자는 직원의 능력을 개발해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곤경에 처하면 회복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죠.
그리고 AI로봇이 못하는 것이 창의성 아니겠습니까?
AI는 수많은 연산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선한 음식이나 창의적인 예술을 선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거죠.
이 모든 것들은 그 사람의 태도에서 나온다고 하죠.
(예화)그런데 그런 부분보다도 더욱 극명한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AI인공지능 로봇에게는 인간이 지닌 감정을 흉내낼 수 없고, 더욱이 영혼이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새벽에 나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떤 한 가족이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딸은 두 개의 보조 다리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죠.
딸보다는 덜했지만 그 딸의 아빠도 보조 다리가 없인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딸은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로 열등감에 시달렸죠.
그런데 딸이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그 딸의 아빠였습니다.
아빠는 딸과 꼭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딸의 아픔을 낱낱이 알고 있었죠.
아빠의 사랑으로 딸은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아빠는 딸을 바라보며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죠.
이제 입학식을 끝내고 교문 밖을 나올 때였습니다.
눈앞에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차도로 한 꼬마 아이가 뛰어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보조 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딸은 너무 놀라서 아빠를 불러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 다리를 양팔에 끼고서 서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엄마가 그 딸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 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사 년 동안 보조 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왜냐고? 너와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한 거야.”
“오늘은 어린 아이가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 봐서 저렇게 뛰어든 거야.”
그러자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보고 있던 딸의 분홍색 파카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사실 그 딸은 마음이 아픈 날이면 늘 아빠 품에 안겨서 울던 딸이었죠.
그때마다 소리를 내 운 것은 딸이었지만, 그 눈물은 아빠 가슴 속에서 더 많이 흘러 내린 것이었습니다.
(적용)어떻습니까?
이런 삶과 이런 감정과 이런 희생이 인공지능 로봇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인공지능 로봇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로봇은 인간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함께 아파할 수 없고, 인간이 지은 죄책에 대해 해결할 방법도 없는 거죠.
인간의 아픔과 죄로 인해 죄책을 온전히 아파하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아픔과 나의 죄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비록 내 몸은 죽을지라도, 자연사나 사고로 죽을지라도, 내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 천국에서 영생할 살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로봇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공감적인 은혜, 참된 생명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899457
(역배)예수님께서 30년간 가정을 위해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목수로서 일하며 사셨죠.
그 이후에 공생애 사역 곧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갈릴리 나사렛을 더나 좀 더 넓은 지역을 다녔죠.
그러면서 각색 병든 자를 고치는 치유사역을 했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 그리고 제자를 삼아 가르치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된 시점, 바로 그때로부터 드디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겠다고 하셨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올라간 건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고자 함이 아니라 수난의 메시아 고난의 메시아를 자처하고자 함이셨죠.
이 땅에 죄로 물든 사람들을 죄악에서 구원하고자 친히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함이셨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고 3일만에 살아날 걸 천명하셨죠.
그런데 그때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어떻게 나섰습니까?
방금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향해 “주님은 그리스도 곧 구원자시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십니다.”하고 고백했던 그였지만 완전 달랐죠.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훈계하고 꾸짖듯이 비난했죠.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요. 저희들이 막을 것입니다.”하면서 말이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여태껏 보여준 기적과 능력이라면 그런 고난과 죽음 없이도 메시아가 될거라 생각했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 좇고 풍랑을 잠잠케 한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로마를 몰아낼 거라 말이죠.
그만큼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되 정치적인 메시아 곧 세상의 권좌를 다스리는 메시아로 알고 자신들도 한 자리 차지하고자 했죠.
그래서 예수님의 길을 막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향해 그렇게 말씀하셨죠.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도다.”
(깨달음)무슨 뜻입니까?
“베드로야. 왜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보다 사람의 영광만 추구하고자 하는데.”하는 뜻이죠.
그렇다고 베드로 자체가 사탄이란 소리는 아니죠.
그러나 인간이 한 순간 사탄의 유혹에 빠지면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 앞에서 일깨워준 것이죠.
그러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고 말이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죠.
사람들이 몰려오고, 돈과 명예가 따라올 때, 그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 그것이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도 〈나는 신이다〉에 나오는, 정명석 박순자, 김기순, 이재록처럼 자기 자아를 부인하지 못하면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했죠.
인간이 언제 타락하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절대로 타락할 수 없죠.
잘 나갈 때, 승승장구할 때, 어려운 시험에 통과하고 좋은 위치를 차지할 때, 사람들이 떠받들 때, 그때 타락하게 되죠.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을 구할때이기 때문이죠.
바로 그때가 나의 자아를 부인하는 것, 나의 교만과 나의 욕망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게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것은 AI인공지능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만 주님 앞에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거죠.
바로 그런 자를 주님은 더욱 귀하게 세워주시고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곧바로 하신 말씀인데 본문 25절 말씀을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역본)이 부분의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원해)여기에 ‘잃는다’는 헬라어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는 파괴하다 잃다 죽다 손상되다(destroy abolish to kill)는 뜻이죠.
‘찾다’는 헬라어 ‘휘리스코’(εὑρίσκω)로 발견하다(discover) 이해하다(understand) 인식하다는 뜻입니다.
이 ‘찾는다’는 헬라어 ‘휘리스코’(εὑρίσκω)로부터 ‘유레카’라는 말이 나온 것이죠.
(예화)기원전 200년경 시라쿠사라는 시칠리아섬에 위치한 그 도시의 와 히에론 2세가 금으로 새 왕관을 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진 왕관이 아니라 은이 섞인 왕관이라는 소문이 돌았죠.
그 소문을 들은 왕은 당시에 매우 유명한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를 불러 은이 섞여 있는지 확인할 방법을 찾아오게 했죠.
그 후 아르키메데스가 생각에 잠겨서 물이 꽉 찬 목욕통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있던 물이 밖으로 흘러넘쳤죠.
그 모습을 본 아르키메데스가 벌거벗은 채로 목욕통에서 뛰쳐나와 ‘유레카’ ‘와우, 나 드디어 찾았어’하는 말을 외친 것이었죠.
순금으로 만든 왕관과 은을 섞어 만든 왕관은 그 밀도가 다르다는 걸 그 목욕통에서 깨달으며 ‘유레카’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컴퓨터 공학의 인공지능(AI) 분야에서 ‘휴리스틱’(heuristic)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죠.
어떤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직 없거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간편하게 푸는 방법이라는 것이죠.
인공지능이 아무리 복잡한 셈법으로 연산작용을 한다고 해도 가장 합리적인 방법 중에 하나를 도출해나는 것 뿐이라는 점이죠.
인간의 복잡한 상황과 감정과 기분이나 죄의 문제까지 어찌 휴리스틱으로 도출해 낼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중요한 것은 ‘찾는다’는 단어가 실은 ‘발견하다’ ‘깨닫다’ ‘인식하다’는 뜻이란 거죠.
내가 아무리 이 세상의 것을 탐하고 나를 세우고자 애써도 나의 참된 자아를 찾을 수 없지만 주님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 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역본)이 부분에 대해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이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세우려는 노력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너희 자신, 곧 너희의 참된 자아를 찾는 길이며 나의 길이다.”
(깨달음)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시죠?
이 세상에 나 스스로를 세우고자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나의 자아를 잃고 만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 할수록 그것이 참된 자아를 찾는 길이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란 뜻입니다.
그것이 평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였지 않습니까?
병든 자가 예수님께서 나아올 때면 그 죄를 지적질하기보다 오히려 민망히 여기며 그 병자를 고쳐주시는 태도 말이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다들 돌로 쳐 죽이려고 할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며 긍휼히 여기는 태도 말이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붙잡혀 재판받고 십자가에 죽을 때 다들 도망쳤던 그 제자들을 다시금 찾아가 손수 조반을 차려주신 예수님의 태도 말이죠.
예수님께 주어진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그 능력으로 이 세상에 당신의 왕국을 세우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세상에서 당신의 자아를 찾으신 게 아니었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그 길을 통해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신 주님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태도를 보여주신 것이요, 우리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야 할 태도임을 일깨워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인공지능이 흉내낼 수 없는 삶의 태도이지 않겠습니까?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아무리 인공지능로봇이 판을 쳐도 자아를 부인하는 삶의 태도를 보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불과 10년만 더 살면 세상이 로봇의 시대이 주도하는 것처럼 바뀌지 않겠느냐?”
“그런 세상에서 로봇과 경쟁하는 것도 지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정받고 존중받고 가치 있는 자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보여주셨듯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자아를 부인하는 자를 주님과 세상이 존중하지 않겠느냐?”
“딸이 사고를 당해 의족을 쓸 때 그 아빠도 함께 아파하듯이, 가족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그렇게 공감하는 자를 세상이 원하지 않겠느냐?”
“인간의 부모도 그럴 진대 하물며 인간의 죄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주님의 태도야말로 네가 본받고 따라야 태도이지 않겠느냐?”
“너의 자아를 부인하는 삶이란 네 지식을 자랑하기보다 동료를 배려하고 함께 아파하는 태도에 달려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보여주신 삶의 태도를 좇아 사는 것이 주님의 기쁨이요 그 삶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죄인을 향해 지적질하기보다 민망히 여기며 그 마음까지 헤아리셨던 태도를 너도 닮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돌로치기보다 주변 사람들도 그 심정을 헤아리도록 하신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공감하는 태도를 보이며 살기를 원치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너를 살리고자 십자가 위에서 몸이 내놓은 것처럼 너도 누군가의 영혼을 건져올리는 통로가 되고자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주님은 기뻐하지 않겠느냐?”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아파하는 그런 태도는 결코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하나님의 진정한 기쁨이요 그런 너를 더욱 새롭게 세워주지 않겠느냐?”
(찬양)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것
겸손히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의 모든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싰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기쁨이 되는 것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7
(예화)캘리포니아의 말리브에 있는 페퍼다대학교의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1백 명의 학생이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67세의 할머니가 끼여 있었죠.
그 할머니는 10명의 자녀와 27명의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였습니다.
이제 할머니가 졸업장을 받으려고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앞쪽에 앉은 사람들 곧 그분의 가족과 손자손녀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드디어 해내셨군요.”
“할머니, 잘하셨어요. 드디어 성공하셨어요.”
그렇게 식이 끝나고 졸업식장을 나서던 할머니는 뒤편에 서 있던 한 노인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확신을 심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제가 졸업할 수 있었겠어요.”
“제가 좌절할 때마다 새 힘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포기하고 말았을 거예요.”
그 할머니는 자신을 배려하고 끊임없이 격려해 준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그 할머니가 그 연세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분에게 믿음을 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 주변에는 지금도 내 격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죠.
지금 내가 인생길을 걸어오기까지 내게 격려해준 사람, 내가 힘들 때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었듯이 말이죠.
더욱이 그 누구보다도 나를 구원해주시고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내가 힘들어할 때 내 등 뒤에서 나를 품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무엇보다도 큰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자라면 지금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동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삶의 태도, 그것이 내 자아를 부인하는 길이요,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태도라는 것이죠.
(내기도)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요, 주님. 그 할머니처럼 제가 제 인생길을 걸어오기까지 가족식구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가 있었어요.”
“내가 지치고 힘들어 할 때 내 곁에서 위로해주고 공감해준 그 누군가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존재할 수 있었어요.”
“더욱이 내가 죄를 지을때도 나를 버리지 않고 지금껏 품어주신 주님의 안아주심과 격려하심이 가장 큰 위로요 힘이었어요.”
“주님. 그런 사랑과 위로와 공감을 받고 살아온 저도 저의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동료에게 나누고 베풀며 살게 해 주세요.”
“그런 태도는 인공지능 로봇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요,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더욱 존귀한 자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을 구원코자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저도 주님의 삶을 본받아 나를 부인하며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그것이 제 자아를 발견하는 길이요 그것이 하나님나라에서 보배로 발견되는 길일 줄 믿습니다.”
(찬양)죄악에 썩은 내 육신을 주님이 쓰시려 했네
죽음의덫에 걸려있는 몸 주님이 쓰시려했네
속죄하는 손 치유하시고 속죄하는 발 치유하셨네
새 생명 얻은 이 몸 다바쳐 주님꼐 영광 돌리리
먹물로 칠한 내 육신을 주님이 희게 하셨네
십자가 보혈 증거하라고 주님이 살리셨네
기도할때에 음성주시고 찬송할때에 기쁨 주시네
내 작은 입이 내 작은 몸이 주님의 붙들린자라
평생 갚아도 빚진자 되어 주님의 빚진자 되어
주님 가신길 택하였건만 눈물만 솟구치네
생명 주신이 주님이시라 능력 주신이 주님이시라
말씀 전하여 복음 전하여 주님의 빚을 갚으리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6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악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지만 주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AI인공지능이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에 빚진 자로서 누군가 배려하고 아파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십자가 사랑을 나누는 자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요, 그런 자를 주님께서 더욱 기뻐히실 줄 믿습니다.
한 주간 동안 그와 같은 십자가를 짊어지며 사는 복된 고난주간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0580
728x90
반응형
LIST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1-6)_20230416 부활후첫번째주일설교 (0) | 2023.04.14 |
---|---|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마28:1-6)_2023년 4월 9일 부활절 설교문 (1) | 2023.04.07 |
동영상설교 자기를 부인하고(마16:21-27)_20230326일 주일설교 (0) | 2023.03.26 |
자기를 부인하고(마16:21-27)_2023년 3월26일 사순절 다섯번째주일설교 (0) | 2023.03.24 |
[동영상설교]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16:21-27)_20230319 사순절네번째주일설교 (0) | 2023.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