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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요즘 〈나는 신이다〉가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의 실체를 폭로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8부작 다큐멘터리죠.
아직 저는 보지 못했지만 대충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누가 이 세상의 신으로 등장합니까?
스스로를 신이라고 천명한 네 명의 메시아들이죠.
기독교복음선교회총재 정명석, 오대양 사건의 박순자, 아가동산의 김기순, 만민중앙교회 이재록이 그들이죠.
그런데 그들이 본래부터 사탄에게 자기 영혼을 팔았겠습니까? 아니죠.
그들도 처음에는 선한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지난번 교단국내선교위원회 부흥키워드 강사로 나섰던 경기도 광주교회의 김철규 목사님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정명석이 어릴 때 다닌 교회가 자기 교회였다고 말이죠.
어디 정명석만 그랬겠습니까?
박순자씨도, 김기순 씨도, 이재록씨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어릴때나 청장년 초입에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는 없습니다.
자기 주위에 사람이 몰려들 때, 자기 인기가 절정에 달할 때, 그때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한 채 사탄에게 자기 영혼을 파는 거죠.
이 땅의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욕망의 우상에 집착할수록 말이죠.
(깨달음)그만큼 ‘자기 부인’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죠.
사람들이 몰려들고, 돈이 들어오고, 명예와 힘이 뒤따라오는데, 누가 쉽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그 마음 속에 두 가지 마음이 싸우지 않겠습니까?
“얘야. 이제는 네 자아를 부인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하고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음성 말이죠.
하지만 한쪽에서는 사탄의 세력이 그 마음을 흔들어대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대로 쭉 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널 추종하고, 돈도 권력도 더 많이 누릴 수 있어”하고 유혹하는 것 말이죠.
그때 자기 자아를 내려놓는 신앙인들, 자기 탐욕을 부인하는 사람들, 이 세상보다 하나님의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것이죠.
(적용)나는 ‘나를 부인하는 사람인가?’ ‘나를 강화하고 내 자아를 좇는 사람인가?’ 어떻게 구분할까요?
나의 관점과 공동체의 관점이 상충될 때 나를 부인하는 사람인가,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성화)요즘 새벽기도회 때 예레미야서를 읽어나가며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으며 새롭게 깨달은 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멸망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었죠.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올 것이니 항복하는 것이 장대비를 맛는 것 같지만 그것이 살길이라고 말이죠.
그들에게 항복하는 게 수치스럽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한 대가로 여기고 참회하는 기간으로 삼으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여호야김도 여호야긴도 마지막 20대 왕 시드기야 왕도 끝끝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죠.
그만큼 왕과 고관대작들은 자기 지위를 내려놓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었죠.
또 하나 새로 깨달은 것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한 일로 나라 안팎에서 고통을 당했다는 거죠.
나라 안쪽에서는 관료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합세해서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가둬버리는 것이었죠.
나라 밖에서는 바벨론에 거주한 느헬람 사람 스마야 같은 거짓 선지자가 편지를 보내 예레미야의 목에 쇠고랑을 채우라고 위협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더 놀라운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죠.
“예레미아야! 네 조상 베냐민 지파에 속한 아나돗의 밭을 사라”하는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깨달음)“전쟁 통에 돈을 챙겨야지 돈을 주고 무슨 밭을 사라니요?”하고 항변했을지 모릅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뱅크(SVB)가 파산하고 스위스 SC은행까지 파산에 직면할 때 다들 은행에서 돈을 빼죠.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패망해 포로가 되는 마당인데 무슨 땅을 사냐면서 예레미야가 따질 수 있었죠.
하지만 예레미야는 자기 판단 자기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채 그 땅을 사죠.
왜죠?
지금은 바벨론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지만 머잖이 하나님께서 다시 이 땅에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미래와 희망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순종하라는 말씀이죠.
(적용)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실리콘밸리 은행이 파산하고 미국 은행들이 뱅크런온다면 그때가 투자할 때구나, 하는 음성으로 들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는 것은 영적으로 그런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조차도 힘들지만 머잖아 도래할 하나님나라에 투자하고 헌신한다면 하나님나라가 도래했을 때 상급으로 베푸신다는 것이죠.
먼저된 자로서 그렇게 헌신하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뿌릴 때 다른 신앙인들도 네가 행한 일에 동참하며 하나님나라를 소망하지 않겠냐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그것조차 예레미야에게, 오늘 우리에게 자기 자아를 내려놓는 자기 부인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30세 전까지 가정에 충실하셨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요셉을 대신해 어머니 마리아와 네 명의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을 책임지는 삶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가정공동체를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었죠.
‘그때로부터’ 갈릴리 나사렛 달동네를 벗어나 갈릴리 주변의 더 넓은 지역을 돌며 더 많은 이들을 만난 이유가 그거였죠.
거기에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내 쫓고 12명의 제자를 삼은 것도 그런 차원이었죠.
마치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 애굽 방식이 아닌 하나님나라 방식을 좇아도록 율례와 법도를 주신 것과 같은 이치였죠.
그렇게 3년간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때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낮고 천한 갈릴리 변방을 벗어나 성전이 있는 중심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 말이죠.
그때 세상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드디어 메시아로 올라가는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목적은 정치적인 왕에 오르고자 올라간 게 아니었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고자 함이셨죠.
고난받는 메시아, 십자자에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메시아를 성취하고자 올라간 것이죠.
그것만이 이 땅에 죄로 물든 사람들의 죄를 자유케 하고 영생을 선물로 주실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고 3일만에 살아날 걸 천명할 때 제자들이 보인 반응이 어땠나요?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자기에게로 데리고 가 조목조목 비난하고 훈계하듯 책망했죠.
지금껏 당신이 보여준 기적과 능력이라면 로마를 뒤엎고 왕이 될 수 있는데, 왜 고난과 죽음을 자처하냐고 말이죠.
당신이 왕이 돼야 우리도 이 땅에서 영의정 좌의정 자리를 차지하며 권세를 누릴 것 아니냐고 말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무슨 뜻이었습니까?
“너는 사탄에게 네 영혼을 팔지 말고, 내 뒤로 물러나 잠잠히 나의 뒤를 따르도록 해라.”
“네가 이 땅의 욕심을을 좇는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나라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뒤따랐으면 좋겠구나.”
(깨달음)지난 시간에 깊이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가 방금까지만 해도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십니다.”하고 고백을 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겠다고 할 때 사탄의 유혹에 빠져 예수님의 길을 방해한 거죠.
사탄은 내가 낙심할 때 찾아오기도 하지만 믿음이 좋고 잘 나갈 때도 찾아온다는 것이었죠.
그만큼 우리는 힘들고 낙심될 때나 믿음이 좋고 잘 나갈때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사탄의 세력에 걸려넘어지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하신 말씀인데, 본문 24절 말씀을 읽어보실까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원해)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모두에게 예수님의 길을 좇아 살려면 먼저 자기를 주인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다’ 말이 헬라어로 ‘아파르네오마이’(ἀπαρνέομαι)인데 ‘부인하다’(deny)입니다.
이것은 ‘자기 주관적이거나 이기적인 마음이 없는 방식으로 살아는 삶’(live in a selfless way)입니다.
자기 자아를 버리고 고집과 체면과 욕망과 명예욕과 소유욕과 과시욕을 버리며 사는 걸 말하죠.
이 땅의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나라의 뜻을 받들며 사는 것입니다.
(원성)이 단어가 구약의 70인역 성경에 쓰인 예가 한 군데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 우상, 금 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며”(사31:7)
‘던져 버리다’가 히브리어로 ‘마아스’(מָאַס)인데 그 뜻이 ‘거절하다’(reject) ‘혐오하다’(abhor)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 부인’과 같은 말이죠.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절하고 혐오하라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은과 금으로 만들어 섬긴 우상들이죠.
물론 그 우상들이 황금으로 빚어 만든 이방 신상만을 뜻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 앞에 애굽이라는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도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었죠.
바로 그런 마음들을 던져 버리고 스스로 혐오한 채 ‘자기 자신들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사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가진 개념이 없었습니다.
개인은 언제나 가족을 비롯해 종족이나 민족 공동체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이죠.
그만큼 각 개인은 가족이나 종족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예수님께서 ‘자기 부인’을 하라는 건 공동체를 위해 자기 관점조차 내려놓으며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14:26)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 자신이나 가족과 주변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관계가 뒷전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야 하나님나라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의와 자비와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며 살 수 있다는 거죠.
(인용)조지 휫필드는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이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는 죽게 될 것입니다.”
“영에 속한 모든 것이 우리 속에서 살아나고 자라기 위해서는 옛사람에 속한 모든 것들이 우리 속에서 죽어야 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Humility)이라는 책에서 겸손에 대해 그렇게 정의한 바가 있죠.
“겸손은 자아를 포기하는 것을 말하며 또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겸손이 없으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성령의 힘도 체험할 수가 없다.”
존 웨슬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설교에서 구원의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달은 사람이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신적인 믿음을 얻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거나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에 부딪치는 것은 언제나 자기 부인이 결핍되거나 십자가 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철저히 따르지 않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늘의 은사를 받았던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유지하지 못하고 믿음이 파선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적용)그렇기에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우리 모두에게도 일평생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24절과 고린도전서 15장 31절을 통해 고백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기 부인이란 이 땅의 정욕과 자랑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때에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사는 신실한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주님의 제자로 사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나라의 자녀로 사는 길은 자기 자아를 부인하며 날마다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삶이지 않겠느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멸망하는데도 밭을 사라는 말씀 앞에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순종하지 않았더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을 따라 사는 삶도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만 된다고 말씀한 것 아니더냐?”
“정명석도 박순자도 김기순도 이재록도 사람이 몰려오고 돈과 명예가 차오를 때 내려놓으라는 주님의 음성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자들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바라는 것과 하나님나라의 일이 겹칠 때 네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걸 기뻐하지 않겠느냐?”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사는 자들인데 너도 날마다 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지 않겠느냐?”
“주변에서 너를 추앙하고 떠받들고 더 많은 걸 누리도록 부추길 때 정명석이나 박순자 김기순과 이재록처럼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 말고 겸손히 주님을 따랐으면 좋겠구나.”
“네가 힘들때나 잘 나갈 때나 언제든 겸손해야만 하나님의 임재 속에 네가 거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온전할 수가 없어요, 고백하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친밀하게 붙들어주지 않겠냐?”
(찬양)주님 한 분밖에는 아는 사람 없어요 가슴 깊이 숨어 있는 주를 사랑하는 맘
주님 한 분밖에는 기억하지 못해요 처음 주를 만난 그날 울며 고백하던 말
나는 행복해요 죄 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 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주님 한 분밖에는 사랑할 이 없어요 작은 가슴 뜨거웁게 주님 피가 흘러요
주님 한 분밖에는 약속한 이 없어요 나를 믿고 따르는 자 반석 위에 서리라
나는 행복해요 죄 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 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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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유대인들의 랍비들이 나누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날 한 천사가 두 여행객을 만나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아주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아주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죠.
한참을 여행하다가 헤어지는 시간이 되었을 때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분 중에서 먼저 한 분이 저에게 소원을 말하시면 제가 그분의 소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분에게는 첫 번째 사람이 얻은 것에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행운에 기뻐해야 할 두 여행객은 오히려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자신이 먼저 이야기했다가는 두 번째 사람이 자기보다 더 많이 얻을 것이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질투가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얻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가만히 있었죠.
그래서 서로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다가 둘 다 아무 말도 안하고 침묵하는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인내심이 극에 달한 욕심 많은 사람은 참다못해 질투심 많은 사람의 목을 꽉 잡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네가 먼저 얘기해. 말 안 하면 죽인다.”
그랬더니 질투 많은 사람이 고민하다가 이렇게 소원을 말하는 것이었죠.
“내 소원은 눈 하나가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어떻게 되었을까요?
질투 많은 사람은 눈 하나만 장님이 되었고 욕심 많은 사람은 두 눈이 다 멀어 버렸습니다.
(깨달음)나보다 남이 잘되는 일에, 나를 부인하는 것, 내 자아를 내려놓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 주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라”(빌2:3-4)말씀하죠.
남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이 곧 자신이 행복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화2)〈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네델란드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전 세계에 크나큰 신앙의 감동과 영향을 남긴 분이죠.
그분의 간증 속에 실린 감동적인 한 토막 이야기입니다.
코리 텐 붐은 그의 가족 모두가 유대인들을 숨겨 줬다는 이유로 체포됐습니다.
독일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죠.
라벤스브룩이라는 참혹한 수용소에서 가족들은 모두 죽고 독일의 패전으로 코리 텐 붐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나왔죠.
감옥에서 나온 후에 그녀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한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핍박하고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인 독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담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독일 마을과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간증집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집회로 인하여 죄책감 가운데 사로잡힌 수많은 독일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한번은 코리 텐 붐이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말씀과 간증을 모두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줄을 서서 그녀를 맞이하는 한 사람을 보는 순간 그녀는 온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그 사람은 감옥에서 자기 언니 벳시가 죽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죄수들을 못살게 괴롭혔던 라벤스브룩의 수용소 간수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 간수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주님께 몇 번이고 외쳤죠.
“하나님, 저 사람은 안 돼요.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저 사람만은 안돼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정할 때마다 계속해서 “그를 사랑해라. 이것은 내가 너에게 하는 명령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마음 속으로 부정하는데 주님은 계속 강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저는 그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사랑할 용기도 없어요.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해보겠습니다”
어느새 그 사람이 자기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사랑의 감정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그를 끌어안았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에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을 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간수를 솔직하게 사랑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기로 ‘자기 자아’를 내려놓는 순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살다보면 정말로 함께 하기 싫은 사람도 있고, 안 만났으면 하는 사람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향해서 주님은 나의 자아를 내려놓고 나를 부인하게 하실 때가 있다는 사실이죠.
그때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해야 하지 않겠느냐”하실 때 기꺼이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사돈이 땅을 사는 것조차 배가 아파하는 이 땅의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저예요.”
“코리텐붐의 언니를 죽인 간수장이를 품으라는 게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주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를 부인하길 원하셨네요.”
“저도 내 삶의 상황속에서 나보다 남이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게 하시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주님의 마음으로 품는 나 자아를 내려놓고 살게 해 주세요.”
“이것은 내 능력이나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님을 알아요.”
“날마다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앞에 죽였던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야만 가능한 일이오니, 날마다 주님과 함께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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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 자아를 부인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자아를 부인하는 삶이란 매일매일 십자가에 앞에 자기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아 죽이는 삶입니다.
혼탁한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믿으며 하나님나라 밭을 산 예레미야처럼 자아를 부인하며 순종하는 자들을 주님은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품으라고 할 때 자기를 부인하고 품은 코리텐붐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떠받들고 돈과 명예가 굴러올때 네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기꺼이 자기 자아를 부인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정명석이나 박순자나 김기순이나 이재록과 같은 신의 자리가 아닌 사람의 정체성을 망각치 않는 길입니다.
그때에만 예레미야처럼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바울처럼 코리텐붐처럼 하나님나라의 길을 따르는 복된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바울처럼 매 순간순간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앞에 죽이며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축복의 통로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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