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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이유로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두 번째 임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결국 유다는 죄악으로 인해 멸망을 당할 것이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하지만 그들의 멸망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이 되어 유다는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아울러 주님은 더 근원적인 회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 14-16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아 죄에서 완전한 회복을 얻게 하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반드시 지키질 것임을 이렇게 확증하셨습니다. 본문 20-21절의 말씀인데,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너희가 깨뜨려서, 낮과 밤이 제 시간에 오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면, 나의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지는 일이 없고, 다윗에게도 그의 왕좌에 앉아서 다스릴 자손이 끊어지는 일이 없고, 나를 섬기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 25-26절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의 주야의 약정이 흔들릴 수 없고, 하늘과 땅의 법칙들이 무너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곱의 자손과 나의 종 다윗의 자손도, 내가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통치자들을 다윗의 자손들 가운데서 세우는 나의 일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참으로 내가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 가운데서 포로가 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겠다.”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궁극적인 유다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일은 바로 바벨론을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우상으로 더럽혀진 그 백성들을 또 굳어진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일이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그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뒤를 따르되, 제사장들로부터 이천 규빗 뒤에서 따라가야 할 것과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성결을 요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단을 넘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차지하는 과정은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은 하나님과 연합하여야 했습니다. 언약궤를 뒤따른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만을 따라가며 그분의 말씀대로만 움직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하고 그분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은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고, 그분의 성품인 거룩함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쫓아 사는 삶은 성결함과 별개가 아니라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분 안에 거하여 그분의 말씀대로 기꺼이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때론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그 막대기로 치심이 주님의 궁극적인 뜻이 아니라, 주님께로 우리를 더 강하게 붙들어 매시기 위해, 때론 세상의 찌든 때로 굳어진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시기 위한 궁극적인 회복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두 번째로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원하시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궁극적인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한 가족이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딸은 두 개의 보조 다리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딸보다는 덜했지만, 그 딸 아빠도 보조 다리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딸은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딸이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아빠였습니다. 아빠는 딸과 꼭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딸의 아픔을 낱낱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사랑으로 딸은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는 딸을 보며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였습니다. 눈앞에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차도로 한 어린 꼬마가 뛰어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보조 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딸은 너무 놀라 아빠를 불렀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 다리를 양팔에 끼고는 서둘러 가버렸습니다. 그때 옆에 계시던 엄마가 이렇게 얘기해 주셨습니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 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사 년 동안 보조 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이야. 오늘은 그 어린 아이가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 봐서 그런 거야…’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보고 있는 딸의 분홍색 파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습니다. 마음이 아픈 날이면 딸은 늘 아빠 품에 안겨서 울었습니다. 그때 마다 소리를 내 운 것은 딸이었지만 눈물은 아빠 가슴 속으로 더 많이 흘러 내렸습니다.”
어떻습니까?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렇지 않겠습니까? 친히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보다 더 많이 가슴으로 우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친히 죽으셨습니다.
내가 눈물로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 하십니다. 오늘도 늘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 내 안에 내 곁에 있음을 느끼고 그래서 행복하고 감사한 하루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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