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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예레미야

아버지가 신 포도주를 먹었으므로(렘31:1-40)

by 똑똑이채널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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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예레미야 31장은 이스라엘 곧 멸망당한 유다 백성들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찢으셨으나 다시금 싸매어주시고, 치셨으나 그들을 치료하시고, 심판하셨으나 그들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렇게 찢으시거나 치시거나 심판하실 필요 없이, 그냥 회복시켜 주시면 좋지 않겠냐,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노아 시대의 홍수도 그런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죠. 굳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홍수로 심판치 않으시고, 그냥 회복시켜 주시면 좋지 않았겠냐,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럴 경우에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 다시 말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율례와 법도를 따른 자들에게는 의의 면류관 곧 생명의 면류관과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죠.

바로 그런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만 천하에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죄를 범한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죠. 바꿔 말해 굳이 오늘 본문을 통해 바벨론에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킬 것이면, 구태여 그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 또 70년 포로기간의 삶을 살게 하신 이유도 마찬가지라는 관점입니다. 징계를 통해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그런 기회를 주신 다음에, 다시금 회복시킨 것입니다.

마치 자녀가 어긋난 길을 갈 때 매로 징계를 해서 바로 잡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물론 장성한 후에는 그 자녀를 매로 들 수가 없고, 자기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그런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1-30절 말씀으로 이스라엘 곧 유다의 회복에 관한 말씀이고, 31-40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는 새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새 언약 가운데는 예루살렘 성읍의 회복에 관한 말씀도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하여 본문 4-5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여기에 ‘다시’라는 말씀이 중요하죠. 이른바 폐허로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다시금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른바 새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 삶을 세우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그들이 나가야 할 삶의 방향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시’ 시작하는 삶은 눈물을 닦게 되고, 소고를 들고 춤을 추는 삶이요, 무너진 땅에 포도열매를 거두는 삶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홍수 심판 이후에 노아의 가족들이 포도열매를 거둔 것과 똑같은 이치죠.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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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하나님의 진심을 본문 20절에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본래 ‘만들다’는 말과 ‘낳다’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만든 것은 피조물이지만, 낳은 것은 아들이기 때문이죠. 사람은 하나님이 낳은 자가 아니라 만든 자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피조물에 불과한 이스라엘을 향해 ‘내 자식이 아니냐’하고 말씀합니다. 이게 과연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조물주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보신 게 아니라 아버지의 자리에서 이스라엘과 눈을 맞추고 계신 것입니다. 눈을 맞추는 마음, 그 마음이 곧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한 없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 그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렸을 때, 그들을 바벨론 제국을 들어 징계하시고 무너뜨리게 하실 때, 어찌 당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견디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등을 돌리고, 당신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지 않을 때, 어찌 창자가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 눈높이를 맞추시면서 우리를 ‘내 아들’이라고 칭하면서까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 마음만 헤아려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바르게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사망이라는 절망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건져 올려주신 주님의 손길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점 말입니다. 죄 사슬에 묶여 절망 속에 한숨 지으며, 사망 앞에 두려워하던 우리를 일으켜세워 주신 주님의 손길을 이미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어떤 징계의 상황 앞에서도 낙담하며 주저앉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낙담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회복시켜주시고 새롭게 세워나가게 하실 주님께 소망을 두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지금 예레미야서를 통해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죄로 인한 징계가 회복과 갱신의 시작점임에도 불구하고, 포로기의 상황 속에 자포자기한 유다 백성들을 향해 본문 29-30절을 통해 일깨워주십니다.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함으로 포로로 끌려가거나 폐허 속에 남게 되는 유다백성들은 분명 깊은 숙명론 속에 자포자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고통과 폐허가 자기 조상들의 죄로 인한 탓으로 돌릴 뿐, 어떤 자구적인 노력도 부질 없는 일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징계를 당하는 것은 조상 탓이 아니라 너희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다’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곧 조상의 탓, 바꿔 말해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너희 자신이 회개하고 바로 서면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다는 시각을 교정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18장 말씀도 동일하게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그것입니다. ‘조상들의 죄로 인한 징계가 그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해석이 그것이죠. 그걸 어디에서 가져오는가? 출애굽기 20장 4-6절의 말씀이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갚으시되 아버지로부터 아들까지 삼사대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조상의 죄로 인해 후손에까지 가계의 저주가 흐른다는 내용이 한국교회에 강타했었죠. 하지만 우리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문학적인 양식으로 보면 대구형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게 되고, 반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뒤따른 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차원이지, 조상의 죄로 인한 징계가 고스란히 삼사대 후손에게까지 그대로 전가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분들, 3대 4대째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분들의 후손들은 조상 덕에 1000대까지 복을 받아 고통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고, 반대로 불신앙의 가정에서 후손들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도 없고 그 자손에 자손까지 모두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난 분들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분들이 있고, 반대로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풍요로운 삶을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내 삶에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요 바로 내가 뱉은 말과 내 행동으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신실한 삶을 살아가면 은혜와 복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선택이고 우리 삶은 각자 행한 대로 책임이 뒤따르는 개별적인 여정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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