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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예레미야

골수에 사무치니(렘20:1-18)

by 똑똑이채널 2023.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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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8장부터 20장까지는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여덟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토기장이의 비유, 그리고 깨어진 옹기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죠. 그 두 가지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습니까? 모든 민족과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셨고, 그것에 근거하여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범죄한 유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예레미야 20장은 18장과 19장에 있는 예레미야의 심판 경고를 들은 유다 백성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보여준 반응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성전의 총 감독인 바스훌이었습니다. 그가 예레미야에게 어떤 박해를 가했는지,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 뜰 곧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였습니다. 그때 바스훌은 그 말씀을 듣고 예레미야를 박해하기 시작했죠. 그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밤새도록 나무고랑에 채워 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전의 총감독 자리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성전의 총감독이란 성전 내부의 질서를 관장하고, 성전에 해악을 끼친 사람들을 징벌하는 직책의 수장이었습니다. 성전의 총감독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묶고 때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선포한 예언 사역이 민심을 혼란케 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전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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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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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레미야는 왕을 비롯해서 여러 정치 지도자들과 성전 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옹기그릇을 깨뜨리면서 그렇게 선포했죠. 어제 읽은 19장 11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한번 깨뜨리면 다시 주워 붙일 수 없는 토기장이의 이 그릇처럼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박살내겠다. 시체가 너무 많아 도벳에 묻을 곳이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유다 백성들의 파멸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메시지를 왕과 정치 지도자 그리고 성전 지도자들이 들었으니, 성전의 총감독 자리를 맡고 있는 바스훌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필시 그는 나라를 어지럽히고, 성전에 해악을 끼치는 인물로 여겼겠죠. 그래서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잡아 폭행하고, 목에 나무고랑을 채워 감금해 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바스훌은 그렇다면 진정한 성전 감독자였습니까? 본문 6절을 보면 예레미야를 박해한 바스훌이 어떤 자였는지 알게 해 줍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 거짓 예언을 행했던 자였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것을 예레미야가 지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거짓을 퍼트렸던 자였을까요? 우리가 이미 읽은 말씀에 비추면, 그 당시의 선지자들과 성전 제사장들 곧 성전을 둘러싼 정치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다들 평안과 안정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나라가 풍전등화로 곧 멸망을 당하는데도, 성전 지도자들은 어용 선지자들은 ‘나라가 평안하다’ ‘안정하다’ ‘자유할 것이다’하고 이야기했었죠. 놀랍게도 성전의 총감독을 맡은 ‘바스훌’이란 이름도 ‘자유’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조차도 거짓을 퍼트리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본문 6절의 끝부분에 너와 너의 거짓 에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너도 너의 친구들처럼, 온통 거짓을 퍼트리는 너의 친구들처럼 너도 멸망당할 것이다, 하고 예레미야가 직격탄을 날린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였으니, 그 당시의 왕도, 지도자들도, 성전의 총 감독자도 결코 달가워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움을 받아, 급기야 매질을 당하면서 감옥에 갇히게 된 신세였죠.

이런 상황속에서 예레미야의 눈에서는 눈물 그칠 리가 없었고, 그의 입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죠.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인 7절 이후에 예레미야의 고뇌에 찬 탄식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불평을 늘어놓게 되죠. 본문 7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여기에서 ‘권유하다’는 말은 “꾀다”는 말이 원문에 더 가까운 뜻입니다. ‘본래 무엇을 할 마음이 없는 사람을 말로 부추겨서 무엇을 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꾀는 것이죠. 블레셋 여인이 삼손을 꾀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낼 때도 그와 같았죠. 그래서 7절을 새번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말하자면 ‘주님,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고생하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야 합니까? 하는 탄식입니다. 상황이 너무 힘드니까 예레미야는 나는 정말 이일이 하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나를 꾀어내어 억지로 고난의 길로 밀어 넣은 것 아닙니까, 하고 항의하는 것과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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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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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두려워하면서 사양을 했었죠. 예레미야 초반부인 1장 6절에서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하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해 주셨죠.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백성들의 반발과 박해는 점점 더 심해졌고, 온갖 조롱과 멸시가 더 거칠어졌죠.

이럴 때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포기하는 것이죠. 주신 말씀대로 선포하지 않고 침묵해 버리는 것 말입니다. 그것을 본문 9절 상반절에서 보여줍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때문에, 처음에는 변명을 했지만 소용이 없고,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시겠다고, 너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해주셨지만, 그래도 중간에 너무 힘이 드니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포기하겠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레미야가 그 속에서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자기에게 ‘불붙는 하나님의 마음’, 자기 골수에 사무치는 하나님의 사랑, 다시 말해 유다 백성들을 한량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9절의 하반절에서 비춰준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나이다.”하고 말입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절절히 골수에 새겨지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자의 길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예레미야의 모습에서 우리 주님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이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예수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죠.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온 백성들을 다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면 알수록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셨죠. 예수님에게도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이 절절히 골수에 사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바꾸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5장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하나님의 그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예수님이 듣고 골수에 새기셨다는 뜻이죠. 그래서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의 길로 나가셨던 것이고요.

예레미야도 그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게 자신에게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다고 본문 8절에서 누차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백성을 사랑하시고, 고치시고,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을 알기에, 그것을 수치와 모욕거리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길에 맞서 나아갔던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크리스천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수모와 모함을 받는다면 그것은 수치거리가 아니겠죠. 오히려 가장 큰 수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한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은 가장 큰 수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한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 저와 여러분은 말씀대로 살다가 받는 수치가 있어도 기꺼이 감사함으로 맞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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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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