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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토기장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은 질그릇 아닙니까? 그런데도 질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할 때 그 질그릇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죠. 토기장이의 뜻대로 하지 않는 질그릇은 결국에는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어제 나눈 18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예레미야 19장 말씀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1-9절로 가증한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둘째는 10-15절로 토기장이 그릇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예레미야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죠. 이스라엘의 패역한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죽이려 하죠. 그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행했을 뿐인데 저들이 나를 죽이려 합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금 19장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하시드란 ‘옹기’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하시드 문’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가까운 ‘예루살렘의 문’을 칭하는 것입니다. ‘힌놈의 골짜기’ 또는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는 예루살렘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위치한 골짜기로 ‘힌놈’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다가 자기 아들들에게 물려준 골짜기입니다.
또 ‘힌놈’이란 곧 ‘애곡’을 뜻하는 말인데, 그 골짜기는 수많은 죽음의 애곡 소리가 들끓어서 ‘애곡의 골짜기’가 된 곳입니다. 후에는 그곳에서 어린 자녀들을 불에 태워 죽일 때에 아이와 부모의 애곡소리가 들려온 곳이기도 하죠. 하나님께서 그 힌놈의 골짜기로 예레미야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을 향해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가증스런 우상숭배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죽음의 골짜기, 통곡의 골짜기, 인신제사의 우상숭배를 행한 그 힌놈의 골짜기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술을 통해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루어질 일들을 선포하게 하실 때, 쉽게 이해 가도록, 실제 사용하는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교훈적으로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10-11절을 보면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하나님께서 함께 간 자들이 보는 앞에서 가져간 ‘옹기’를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옹기는 진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물기가 없는 옹기 속에는 문서나 다른 물건들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죠. 물론 진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럽게 되면 그 옹기는 부정해서 깨트려 버렸습니다.
레위기 11장 33절에 보면 그 옹기와 관련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패역하고 악한 죄에 빠져 더럽혀진 질그릇에 대해 율법에 따라 그것을 깨트리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범했다면, 그들조차도 옹기처럼 깨트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삶의 필수품들을 통해 그 상징성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옹기가 실제 삶에 절실하지만 추악하고 더렵혀지면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처럼,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본래부터 그런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보배와 같은 존재들였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4장 2절을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본래 그들은 순금에 비할 만큼의 보배로운 아들들인데, 그러나 지금은 쓸모없는 옹기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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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들의 참상의 모습은 본문 6-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도벳은 예루살렘 서쪽의 힌놈골짜기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기드론 골짜기가 합해지는 중간 지역에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가롯 유다가 목을 매어 죽었던 피밭이라고 불리는 아겔다마의 근처이기도 하죠.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엄하게 금하신 이방신 ‘바알과 몰렉’에게 ‘어린아이의 인신제사’를 지낸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패역의 장소가 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8장 21절을 통해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만큼 자녀를 불로 태워드리는 인신제사를 율법으로 금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방인들의 제사에는 그런 제사가 횡행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악행을 결코 용납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때, 그리고 여호야김 시대에 그런 악행의 제사가 성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곳에 사람을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너희들의 시체가 쌓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 자기 자식들을 이방 신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이제는 너희의 그 죄악으로 인해 너희들이 죽임을 당해 그곳에 쌓이게 될 것인데, 얼마나 시체가 많은지 도무지 장사지낼 공간조차 없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도벳의 골짜기 곧 ‘힌놈의 골짜기’라 불리던 그곳이 신약시대에는 ‘게 엔나’이라는 헬라어로, 그리고 영어로는 지옥을 의미하는 헬(Hell)이 바뀌어 부르게 되죠. 마가복음 9장 43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 힌놈의 골짜기가 더 이상 힌놈의 골짜기가 아니라 이제는 ‘게 엔나’ 곧 지옥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은 온 성읍의 사람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너무 놀라서 동정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 백성들, 곧 예루살렘 백성들이 그렇게 엄청난 치욕과 모멸과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됩니까? 본문 4-5절에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5.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그리고 15절 하반절에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그들이 그런 고통과 조롱을 당하는 이유는 알지 못하는 신들을 좇아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했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소원성취하는 정도로, 하나님을 부적 정도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안중에도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고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줄 거짓 선지자들을 원했던 것이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율례와 법도를 따른다고 하니, 어찌 하나님의 심판이 그곳에 임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토기장이요, 우리는 진흙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나를 진리와 생명의 말씀 앞에 더욱더 깨트릴 때에만 진리의 형상을 좇아 닮아갈 수 있지만, 진리와 생명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 욕심의 형상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행위를 통해 삶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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