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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사람은 저마다 인생의 변화를 준 터닝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와 만남을 통해, 또 어떤 사건을 통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아브라함에게는 언제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을까요?
70세까지 상속자 없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무 조각상 곧 우상을 만들어 팔던 그였죠.
그 후에 아버지를 따라 5-6년간 하란 땅 좀 더 번화한 중심지에서 살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상속자가 없었고 그 5-6년 어간의 삶 속에서 아버지 데라마저 죽고 말았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너희 후손을 창대케 할 것이라고 하셨던 그때, 바로 그때가 아브라함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죠.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란 땅을 박차고 미지의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죠.
물론 그때부터 100살이 되어 약속의 기업을 이룰 이삭을 낳기까지 연약한 인간의 모습처럼 넘어지고 일어서고 넘어지는 모습을 반복했죠.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였고 이유없이 복을 좇아 그랄도 내려가기도 했고, 자기 몸종 하갈을 통해 상속자를 삼으려고 했던 모습들이 그것이죠.
그런 이삭이 37살 곧 30대가 됐을 때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죽어도 다시 살릴 것을 믿었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렸죠.
그것이 자기 소유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었죠.
그렇다면 모세는 언제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을까요?
애굽의 궁궐에서 40년간 왕자의 신분으로 살다가 애굽 병사를 때려 죽였을 때였지 않을까요?
그때 자기 신분이 탄로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40년을 살았으니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진실되게 만난 것도,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도, 미디안 광야 40년 빈털터리 때였으니 말이죠.
야곱에게는 언제가 자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을까요?
형 에서가 익숙한 사냥꾼으로 살면서 이방 족속의 타락한 문화에 심취해 있을 때도 야곱은 집안에서 조용히 지냈죠.
그러다 형이 배가 고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팔라고 했고 그것을 야곱이 팥죽을 줘서 사게 됐죠.
그 후에 아버지 이삭이 죽을 날이 임박하자 에서에게 축복을 하고자 할 때 야곱이 그 축복을 가로챘죠.
어쩌면 그때가 야곱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찾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은 20년 넘게 밧단 아람으로 도망쳐 죽을 고생하며 인생의 연단을 받았으니 말이죠.
물론 그가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터닝 포인트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브니엘’의 체험 때였죠.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의 환도뼈를 위골시켰고 그때 비로소 남은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내어맡겼으니 말이죠.
바울에게는 언제가 그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을까요?
청소년 시절에 고향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에 유학을 왔을 때 모든 율법의 학문을 마스터한 그였죠.
장래가 그야말로 촉망받은 청년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의 산헤드린을 꿈꾸며 모든 율법에 열심을 냈던 그였죠.
심지어 유대교가 부정하고 축출하려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그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그 길목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바로 그때가 그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죠.
그리고 바울에게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면 2차 선교여행 때였죠.
자신이 목적하는 곳은 오늘날의 트뤼키예 서남쪽 곧 소아시아 남부지역인 에베소였지만 성령님께서는 드로아 항구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환상을 보여주셨죠.
마게도냐 사람들 곧 유럽 대륙의 사람이 손짓하여 우리를 도우라는 그 환상 말이죠.
바로 그때가 이제껏 세계를 향해 나아가보지 못한 바울에게는 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죠.
그때부터 그의 사명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사명을 완수하게 되는 선교사역의 터닝포인트였죠.
(깨달음)어떻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와 여러분들도 나름대로의 인생 터닝 포인트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전혀 몰랐는데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된 터닝 포인트가 있을 수 있겠죠.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성령님께서 어떤 생각을 불어넣어 자유로교회로 가라는 그런 터닝포인트도 있을 수 있구요.
그렇듯 우리는 저마다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사건을 통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신앙의 터닝 포인트가 발생하기도 하죠.
그런 신앙의 터닝 포인트 중에도 한 두 차례 더 깊은 터닝 포인트가 있기 마련입니다.
첫 번째 터닝 포인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터닝 포인트요,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사명을 위한 터닝 포인트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았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첫 번째 터닝 포인트죠.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서서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두 번째 터닝 포인트입니다.
사명을 좇아 산다고 해서 자신의 직업이나 위치나 신분을 내던지고 땅끝 오지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는 걸 말하는 게 아니죠.
주어진 삶의 자리와 위치에서 주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데 그 삶의 초점을 맞추며 새롭게 살아가는 걸 말하죠.
집사로서 주님께 충성하는 모습을 넘어서 새로운 임직자로 새롭게 주님의 나라에 헌신하는 모습도 그런 과정이라 할 수 있겠죠.
(적용)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태어나신 이후에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자라면서 아버지 일을 도왔죠.
이른 나이에 죽은 아버지 요셉의 뒤를 이어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와 두 명의 여동생을 돌봐야 했죠.
예수님께서 30세가 될 때까지 목수로서 가정과 동생들을 돌본 자기 인생을 산 게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30세가 되었을 때 예수님의 인생은 터닝 포인트를 가져왔죠.
곧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역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는 가정과 동생들을 떠나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갈릴리를 무대 삼아 병든 자를 고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면서 사셨죠.
그리고 마지막 터닝 포인트가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실은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완수하는 사명의 길이었죠.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대속해주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로 부활하시는 마지막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우해 죽는 그 삶의 터닝 포인트를 갖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예수님의 터닝 포인트를 따라가는 인생이 돼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죠.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 마태복음은 세리 마태 곧 본명이 레위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난 이후에 같은 유대인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메시아요 언약의 성취자로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동족에게 설명하고자 쓴 것이죠.
마태복음 1∼2장이 서론인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고 시작하는 이유도 그것이죠.
그리고 26∼28장이 부활승천장으로 결론인데 그때도 “하늘과 땅과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하고 선포하셨죠.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하늘의 세계와 이 땅의 세계,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왕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알리고자 마태복음서를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와 모든 나라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믿는 교회 곧 우리는 누구이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곧 천국 백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우리의 정체성은 천국 시민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죠.
이 세상의 부모님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사는 나라가 한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러시아든, 예수님을 믿는 이후부터는 천국백성이 된 것이죠.
그렇기에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하나님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소속된 자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나라에 소속된 백성이죠.
그러나 우선순위에서는 대한민국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백성 곧 천국백성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야 하는 거죠.
그렇다면 마태복음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마태복음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 무대가 다른 복음서들처럼 갈릴리 사역이 주무대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가복음서도 누가복음서도 요한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위해 나설 때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공생애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죽기 직전에 예루살렘에 내려와서 사역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숨을 거두셨죠.
이것이 마태복음서의 지리적이고 시간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기본적인 배경 속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전 모습, 공생에 중에 일반 대중들을 향한 사역(마4:17), 그리고 마지막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사역(마16:16)한 모습이죠.
그리고 그 세 등 분 속에 예수님과 관련된 행적과 예수님의 설교가 다섯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과연 다섯 가지 설교가 어떤 내용입니까?
산상설교, 제자들을 파송하는 설교, 천국비유 설교, 교회 회원권에 관한 설교, 그리고 종말에 관한 설교가 그것입니다.
마치 구약성경의 모세오경을 연상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천국시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었죠.
(본문)그 중에서도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어떤 상황 속에서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
(원해)여기에서 키 포인트는 “이 때로부터”입니다.
‘이때로부터’란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때로부터’란 헬라어 ‘아포 토테’(Ἀπὸ τότε)인데 ‘그때부터’(From that time forth)라는 말입니다.
‘아포 토테’란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세 번이나 사용됐습니다(마4:17, 마16:21, 마26:16).
(깨달음)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때로부터”란 이전의 가정과 동생들의 아버지 역할로 사셨던 개인의 삶에 충실한 데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 시점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생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있죠.
자신과 가정과 동생들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사역이죠.
마치 대통령으로서 공적인 일을 수행하기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지금의 대통령은 검사시절의 모습과 지금의 대통령의 모습이 달라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16장 21절 말씀에 나오는 “이때로부터”는 베드로가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이후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 곧 황제의 도시 한 복판에서 예수님께 물은 것이었죠.
“얘들아.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세례 요한으로, 더러는 엘리야로,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로 여깁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그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고백했죠.
“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른바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요 구원자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개의 새끼는 개요 소의 새끼는 소요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똑같은 격이었죠.
바로 그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 “이때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예수님의 두 번째 인생 포인트 곧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때입니다.
“이때로부터”라는 단어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가롯 유다가 “그때부터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하는 부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관련하여 위대한 터닝 포인트를 하게 된 말씀은 두 번의 경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생애 사역전과 그 후,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천명하기 전과 그 후죠.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는 획을 긋는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적용)그것은 아브라함이 30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던 그때의 터닝 포인트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은 미디안 광야의 40세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 앞에 죽으면 죽으리가 하고 바로 앞에 나아가던 터닝 포인트와 같은 격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위골이 되는 그 죽음의 과정을 통해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던 터닝 포인트과 같은 것이죠.
그것은 우리 각자의 모습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전에는 나의 행복과 내가 잘되기만을 위해 주님을 믿고 의지했다면 이제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진정한 직분자요 임직자로 살게 하시는 그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는 것 말입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믿고 살아도 세상과 구별됨 없이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의 진정한 사명자요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명자의 터닝 포인트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생애 사역만을 위해 살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제는 십자가 죽음을 결단하는 터닝포인트를 맞이하는 모습과 같은 격이지 않겠습니까?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와 함께 죽으며 살아가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며 사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아브라함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터닝 포인트는 그의 독자까지도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고 바친 그때이지 않겠느냐?”
“모세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명자로 변화된 터닝 포인트는 바로 앞에 서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일일지라도 기꺼이 그를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던진 때이지 않았더냐?”
“야곱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터닝 포인트는 얍복강에서 뼈가 위골이 되는 그 죽음의 과정에 있지 않았더냐?”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사역을 위해 나서는 그때가 터닝 포인트였지만 가장 위대한 터닝 포인트는 십자가 죽음을 천명한 모습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원할 때 이삭까지도 내어드렸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터닝 포인트가 있느냐?”
“모세가 바로 앞에 서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내어던진 것처럼 너에게도 그런 결단의 터닝 포인트가 있느냐?”
“야곱이 얍복강에서 뼈가 위골이 되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 다시 살아난 것처럼 너의 자아와 혈기가 죽은 터닝 포인트가 있느냐?”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지시겠다고 천명하신 그 모습처럼 너도 십자가 고난을 향해 나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있느냐?”
“우리 주님은 네가 직분자로서 임직자로서 주님께서는 당하신 그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터닝 포인트를 원하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예화)선한목자교회를 섬긴 고(故) 김대영 권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태어나면서 이혼한 부모님 밑에 자랐습니다.
그 까닭에 어려서부터 알콜중독과 대마초와 음란과 같은 방탕한 삶을 살았죠.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서도 바르게 살지 못했습니다.
어느 유부녀와 불륜에 빠지게 되었죠.
그런데 그 여자가 어느날 폭탄 발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서로 가정으로 돌아가자”
그 말에 화가 난 그는 양쪽 가정을 파탄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남편과 자기 아내를 각각 불러 불륜사실을 폭로해버린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아내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자기 아내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길래,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 주일날 교회에 나가게 되었죠.
그런데 그날 설교를 통해 자기 자신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임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죠.
지옥 문턱까지 갔던 그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천국시민권자로 건짐 받은 날이었습니다.
이 세상 향락에 빠져 있던 그가 예수님 안으로 턴하게 된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그날 이후 변화된 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받는 그 날 간증하는 자리에서 지난 날의 적나라한 죄악을 모두 고백했습니다.
그 이후 서리집사도 아닌 그에 대해 ‘기도왕’ ‘전도왕’ ‘장로 같은 성도’ ‘선교사’로 불렀죠.
그 뒤 하나님께서는 그를 중국 나환자촌 선교사로 부르셨는데, 선교사 훈련받는 중에 선한목자교회 경비로 일을 했습니다.
월급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교회 경비로 한 아니라, 선교사 훈련자로, 천국문지기로 생각하고 말이죠.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평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죠.
그 와중에 그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고, 항암치료 후에 중국 시안 한중의 나환자촌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그 후에 몸이 악화돼 귀국했는데, 그 후에도 숨이 끊어질때까지 계속 전도를 했습니다.
교회 성도들은 김대영 권사와 함께 할 때 전도할 힘이 난다고 할 정도였죠.
그 과정 속에서 부모님과도, 동생들과도, 그리고 아들과도 관계가 모두 회복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분의 장례식날, 생전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대영 권사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 같습니까?
김대영 권사가 세상 향락을 버리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그 아내가 보여준 주님의 사랑 때문이지 않습니까?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식 앞에 그 아내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겠습니까?
그것이 그 아내에게는 얼마나 큰 괴로움이요 무거운 십자가였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을 사랑해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녀도 그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단할 때, 그 남편의 인생길을 주님께 되돌려 놓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첫 번째 터닝포인트였다면, 중국의 나환자촌으로 부르시는 소명은 두 번째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그것도 대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받은 후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께 감사하며 순종했던 그였죠.
(적용)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첫째 날에 주님께서 무엇을 돌아보게 하십니까?
내게 부여하신 십자가 아니겠습니까?
가정이나 일터나 교회에서, 하나님나라에서 짊어지기 실은 그 십자가 말이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십자가 말이죠.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때로부터”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결단하셨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영생의 은혜 속에서 천국의 시민권자라는 선물을 베풀어주신 것이죠.
(내기도)그렇기에 사순절 첫째날을 맞이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강대형 권사도 그의 아내를 통해 그를 구원해주시는 터닝 포인트를 삼아주셨네요.”
“주님의 터닝 포인트가 없었다면 어찌 세상 향락에서 천국의 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겠습까?”
“주님. 저도 그 은혜를 받은 자답게 제게 부여하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살게 해 주세요.”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도, 나를 짓눌러 오는 사람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조차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이제부터’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겠어요.”
“내 혈기와 고집과 자아가 불쑥 튀어나올때마다 주님께서 결단하신 십자가의 터닝포인트를 묵상하며 살게 해 주세요.”
“강대형 권사님처럼 제가 중국의 나환자촌이나 선교사로 나갈 순 없어도 내가 머문 자리에서 내게 붙여준 사람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는 십자가 터닝 포인트를 이루게 해 주세요.”
(찬양)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무너진 나의 삶속에 잊혀진 주 은혜
돌 같은 내마음 어루 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들을 통해 구원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요 우리를 성숙한 하나님의 시민권자로 삼고자 십자가의 터닝 포인트도 허락하시는 아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위해 터닝포인트를 이루셨지만 십자가 터닝 포인트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십자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창피스럽고 모욕적인 줄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짐으로 여기지 않고 사랑과 사명으로 받아들이셨고 끝내 부활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내게 힘들게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과 일들이 겹겹이 쌓여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짊어지며 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이때부터 십자가 터닝 포인트’를 결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인류가 사는 것처럼, 내가 죽어야 내 가정과 자녀들과 주변 사람들이 산다면, 기꺼이 그 길에 터닝 포인트로 삼을 수 있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이들을 통해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주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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