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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현재 트뤼키예와 시리아 지진 사망자가 4만 명이 넘어섰다고 보도를 합니다.
건물이 무너진 잔해더미 속에 매몰된 이들은 2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고요.
물론 시리아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의 숫자는 포함돼 있지 않아 더 많을 것으로 내다봅니다.
그런데 지진이 발생한 인근 지역의 건물은 모두 붕괴됐지만 무너지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하죠.
인구 4만 2천명 규모가 사는 ‘에르진’이라는 도시가 그곳입니다.
그 지역은 무너진 건물도 없고 사망자가 한 명이 없다고 하죠.
그 같은 이유는 건축물을 지을 때 내진설계에 철저히 대비해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죠.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이 있었죠.
시리아 북서부의 ‘진다이리스’에서 무너진 건물잔해 속에 신생아가 구조된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아랍어로 ‘기적’을 뜻하는 ‘아야노’라고 부른다고 하죠.
그 아이가 구조될 당시 어머니와 탯줄이 연결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지진 직후에 진통이 시작돼 출산 후에 곧장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아버지와 형제 자매 4명과 고모도 지진으로 죽었고요.
그 속에서 그 아이가 극적으로 구조돼 세상밖으로 나왔으니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입양해 더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고자 합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대형 사고나 재난 앞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현장에서 살아난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소망을 갖게 되죠.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생존자가 나왔으니 더 있을지도 모르는 기대와 소망 말이죠.
그래서 그 잔해더미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하고자 건물 잔해를 하나씩 하나씩 걷어내는 것이죠.
물론 그 속에서 깔려있는 사람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잔해더미 위쪽의 틈 사이로 내리비치는 빛을 통해 호흡도 하고 소망을 갖게 되겠죠.
빛이 하나라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예 절망할텐데 그 빛이 한오라기라도 비친다면 그 빛을 통해 살 수 있겠다는 소망을 품는 것 말이죠.
(적용)죄와 사망의 무덤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로마 병사가 창을 찔러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발목도 비틀어 버렸을 때, 그 분은 누가 봐도 완전히 죽은 시체였습니다.
그렇게 싸늘한 시체가 되신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동굴무덤에 안치했죠.
그것으로 이제는 이 세상의 살아있는 사람들과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죠.
그때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랐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절망과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무덤 가운데서 다시금 살아서 걸어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모습을 본 여인들도 제자들도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부활하신 것, 시체 가운데 다시금 살아나신 것은 사실이었죠.
그런데 왜 그와 같은 부활의 역사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까?
이 세상의 지진이나 다른 문제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을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기 위함이셨죠.
이 세상에 그 어떤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와도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는 자들에게는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말입니다.
물론 그 예수님은 하늘로 부활승천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또다시 절망에 휩쌓이게 되었습니까?
아니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그 분이 약속한 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그 당시 제자들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임재하여 빛으로 친히 인도해주고 계시는 분이시죠.
그만큼 이 세상의 지진과 재난과 공포 속에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하심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사명을 부여하셨죠.
그 시대에 태어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게 항상 악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죄악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고 새로운 시조를 시작토록 하기 위해 방주를 지으라는 것이었죠.
그런 사명을 부여받은 때가 노아의 500세 되던 해였죠.
방주는 600세 되던 해에 시작됐으니 노아의 세 아들과 함께 방주를 지어 들어갔다면 적어도 80-90년은 걸린 셈이었죠.
물론 500세 되던 그 해부터 방주를 지으라는 사명감을 노아가 가슴에 새겼다면 그때부터 방주를 지을 나무를 마음 속에 심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그 방주를 지을 규모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길이는 300규빗, 너비는 50규빗, 높이는 30규빗입니다.
그것을 상중하 삼층으로 해서 지으라고 하셨죠.
1규빗이란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로 보통 45cm로 잡습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수치로 환산하면 방주 길이는 137m, 너비는 23m, 높이는 14m 크기죠.
상암월드컵 경기장보다 더 큰 규모입니다.
그것들의 수치를 모두 곱하면 43,000㎥의 부피가 나옵니다.
그 부피는 아파트 4층 높이에 우주왕복선 3개를 놓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양도 최소한 120,000마리를 실을 수 있는 공간의 크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지만 그것을 코페르 나무로 만들고 거기에 코페르를 코파르 하라고 역청으로 칠하도록 했죠.
왜 역청을 칠하도록 한 것입니까?
잣나무든 편백나무든 그 어떤 코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었어도 역청을 칠해서 새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인인 우리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역청을 매일 바르고 뿌리고 덮는 게 중요하죠.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조금만 방심해도 영적인 빈틈을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은 연약하기 짝이 없어서 이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영적인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는 모습이죠.
그러니 그때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역청을 매일매일 바르고 뿌리고 덮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내 인생의 배, 구원받은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인생의 배가 믿음으로 항해하며 나갈 수 있는 거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가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원해)여기에 나오는 ‘창’이 무엇이겠습니까?
‘창문’을 뜻하는 말이죠.
‘창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쪼헤르’(צֹהַר)는 그 원형 ‘짜헤르’(צָהַר)가 ‘기름을 바르다’ ‘반짝이다’(glisten)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에 24번이나 사용됐죠.
그 중에 23번은 ‘정오’(창43:16)나 ‘정오의 태양’(왕상18:26)으로 번역이 됐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창문’으로 번역이 됐고요.
그런데 노아의 방주 가운데 실제 창문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8장 6절 말씀입니다.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40일간 홍수가 쏟아진 후에 노아가 까마귀를 내보냈다는 말씀입니다.
물이 줄었는지 알아보고자 까마귀를 내보냈는데 그때 창문을 통해 내 보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창문’과 오늘 본문의 창문으로 기록된 ‘쪼헤르’가 다릅니다.
거기에 기록된 ‘창문’은 ‘헬론’(חַלּוֹן)입니다.
그 단어는 구약성경에 32회 기록돼 있는데 대부분 ‘창문’(창26:8, 수2:15, 렘9:21)으로 번역됐죠.
(깨달음)그렇다면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때 3층 구조로 만들고 각 층마다 문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맨 꼭대기 지붕에 창문을 만들도록 한 것이죠.
그렇다면 왜 창문을 만들도록 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창문을 통해 두 가지 기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하나의 기능은 오늘 본문의 단어처럼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입니다.
다른 하나의 기능은 홍수가 끝나고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새들을 내보내기 위함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창문의 기능은 ‘빛이 들어오도록 하는 기능’입니다.
(적용)그렇다면 왜 빛이 들오도록 창문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습니까?
노아와 그 가족들은 그 방주 안에서 1년 17일간 지냈습니다.
방주를 지을 때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었습니다.
방주에서 나올 때도 하나님께서 나가라고 할 때 나갔죠.
방주는 키도 닻도 노도 없었기 때문에 노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물결이 너울거리면 너울거리는 데로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었죠.
그 사이에 물이 감했나 그 여부를 알고자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 보냈습니다.
하지만 1년 17일 동안은 그 방주 안에서 꼼짝 없이 지내야 했던 노아와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만큼 그 방주는 어두컴컴한 곳이요, 냄새 나는 곳이었습니다.
방주 안에서 노아가 인위적인 불빛을 준비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불빛보다 하늘로부터 비추는 정오의 태양빛이 중요한 법이죠.
그 빛을 통해서 숨을 내쉴 수 있고 그 빛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죠.
그만큼 노아의 방주를 만들 때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절대적입니다.
그 빛은 오늘날 성령님의 임재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원성)“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깨달음)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우리들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자 그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죠.
그때부터 제자들의 사명이 다할 때까지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스승처럼 길을 인도해주셨죠.
그 보혜사 성령님이 없이는 제자다운 삶도, 사명자의 삶도 살 수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오늘 노아의 방주와 같은 우리 인생의 방주에도 창문의 빛,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의 빛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방주에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의 빛을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트뤼키예와 시리아의 지진 더미 속에서 태아를 건져 올릴 때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지 않았더냐?”
“그 아이가 지진의 잔해더미 속에서 건져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틈 사이로 비추는 빛 때문이지 않았더냐?”
“수많은 매몰자들이 암흑과 같은 그 지하 잔해더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그 틈 사이로 비추는 빛 때문이지 않더냐?”
“상중하 3층으로 지어진 노아의 방주 맨 위에 창문을 만들라고 한 이유도 그것이지 않더냐?”
“온통 냄새나고 온통 암흑으로 뒤덮인 그 방주에 숨통을 틀 수 있고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도록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인생의 구원의 방주도 창문이 놔 있어야 성령님의 빛이 임재하고 성령님께서 빛가운데 너를 인도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답답하고 막막할지라도 네 심령에 있는 창문을 통해 성령님께서 빛을 비춰주시고 말씀해주시면 소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도 사망과 어둠의 동굴 무덤을 꿰뚫고 시체가운데 부활하신 것도 너에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불어넣어주시기 위함 아니더냐?”
“지금도 이 세상은 어둠과 죄악의 지진 더미와 같은 상황이지만 그 속에서도 성령님께서 네 심령의 창문을 통해 빛을 비춰주시고 말씀해주시니 그것이 은혜이지 않더냐?”
(찬양)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음므로 나는 있고 당신의 노래가 있으므로 나는 있고
당신의 노래가 있음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발췌) 빈센트 반 고흐는 세계적인 명작을 그린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이 그의 대표작이죠.
사실 그는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전도사 지망생으로 탄광촌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하나님의 부름 곧 그림을 그리는 소명을 부여받게 되죠.
물론 그의 가난한 삶을 후원하는 테오라는 동생 덕분에 그가 화가로서 작품활동을 할 수가 있었죠.
그런데 여러 가지 암울한 상황을 맞이하다가 1889년 5월 8일 ‘생 레메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죠.
그가 입원한 그 병실은 갑갑하고 어두침침했죠.
하지만 그 창문 너머로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죠.
그의 세계적인 명작 ‘별이 빛나는 밤’은 바로 그 창문을 통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리스도인도 빈센트 반 고흐처럼 어려운 여건과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감옥과도 같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처럼 절망이라는 감옥에 우리가 갇힐 수 있죠.
하지만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창문을 통해 빛을 비춰주시고 우리를 감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심령의 창문을 통해 빛을 바라보는 자들은 어떤 절망의 늪에서도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심령의 창문을 통해 비추시는 그 빛을 맞이하는 자들은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참된 소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2)링글린 브러더즈 서커스단이 뉴욕 공연을 할 때였다고 합니다.
그 공연 중에 갑자기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1분 간이었지만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대에서는 조련사 한 명이 호랑이 네 마리를 통해 재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철창 속이니까 관중에게는 위험이 없었지만 캄캄한 데서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하고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서는 조련사의 채찍 소리와 호랑이의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 계속 들려왔습니다.
이제 불빛이 다시 켜지자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후에 기자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듯이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까?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제압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적용)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실은 어둠의 세상 아닙니까?
마귀 사탄의 세력이 사자처럼 어둠 속에 달려드는 세상 아닙니까?
그와 같은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려면 저와 여러분도 빛의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방주가 어둡고 답답해도 내 심령에 창문이 놔 있으면 우리 주님은 그 창문을 통해서 얼마든지 빛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내 인생의 항해선이 두렵고 답답해도 내 심령에 창문이 놔 있으면 성령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내 인생의 항해선을 친히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이 세상은 어둠과 죄악과 두려움이 밀려드는 흑암의 항해선과 같아요.”
“그러나 주님. 내 인생의 항해선이 두렵고 답답하고 암흑으로 가득차 있어도 창문이 놓여 있으면 성령님은 제게 빛을 비춰주시고 친히 인도해주시는 은혜를 베푸실 줄 믿어요.”
“빈센트 반 고흐도 그 정신병원에 놓여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대작을 그릴 수 있었어요.”
“무대에 불이 꺼져 앞이 보이지 않아도 그 조련사는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을 본다는 자세로 임했어요.”
“주님, 제가 살아가는 세상이 힘들고 어렵고 유혹이 많을지라도 그 속에서도 빛되신 주님을 보고 주님의 임재속에 살가는 창문을 허락해주세요.”
“그리하여 매일매일 내 인생의 항해선이 빛가운데 운항할 수 있도록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인도해주세요.”
“오늘도 성령님의 빛 가운데 살게 하시고, 성령님의 빛 가운데 인도함 받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찬양)성령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혼 살리소서.
성령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 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 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트뤼키예와 시리아 지진처럼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끊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 두려움과 공포의 현장에 생명을 건져올리면 모두가 축하하고 기뻐하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노아의 방주도 실은 어둠과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드는 인생 항해선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실은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판을 치는 세상이죠.
이런 인생 항해선 속에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승리하는 항해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어둠과 두려움이 가득찬 인생 항해선에 주님과 소통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모셔들이는 창문이 있기 때문이죠.
내 인생의 항해선에 두려움이 가득차 있어도 우리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가 그것 아닙니까?
주님과 호흡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빛 가운데 인도해주시는 영혼의 창문이 놓여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죄와 사망의 동굴 무덤을 꿰뚫고 시체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이 세상에 부활의 빛으로 비춰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가 어둡고 답답해도 내 영혼의 창문을 통해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고 성령님의 빛을 통해 소망으로 인도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창문을 두게 하셨듯이 내 인생의 항해선에도 창문을 두도록 하셔서 지금도 친히 말씀하시고 성령님의 빛으로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하도록, 그런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다함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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