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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델로 삼고 있는 교회의 결혼예배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결혼예배와 준비과정, 그리고 순서가 매우 까다로운 편에 속합니다. 먼저 예비 신랑과 신부에게 결혼청원서를 서로 작성하게 합니다. 그 청원서를 준비하게 할 때는 서로가 건강진단서와 혼인관계증명서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래서 결혼청혼서를 교회에 제출토록 한 다음에, 결혼당사자들에게 결혼서약서와 결혼예배 순서지를 직접 준비토록 하죠. 그리고 그 혼인식 때에는 다른 축하곡들보다도 오직 ‘주님의 기도’를 부르게 하고, 그 노래를 부를 때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도록, 신랑과 신부가 무릎을 꿇게 하죠.
그래서 그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는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를 입지 않고, 간단한 드레스와 기본적인 양복만 입게 합니다. 결혼식 당일, 교회 예배당에서 할 경우에 신랑과 신부 측은 축의금을 따로 받지 않게 하고 결혼예배 후에는 피로연도 갖지를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의 결혼예배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예배가 예배답게 드려지도록 하고 있고, 따라서 예배를 방해하는 어떤 장식이나 공연 그리고 다른 행동들을 다 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결혼예식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두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예배보다도 고귀하고 성스러운 시간이죠. 결혼예배 중에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결혼 서약식을 갖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며 약속하는 시간입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심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며 일평생 남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라 서약을 하죠. 신부도 신랑에게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 삼아 온전히 순종하며 일평생 아내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약을 합니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마주하며 행하는 결혼식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성스러운 결혼을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를 그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남편이라 말씀하시고, 그 백성을 신부라 표현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백성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에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부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과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고, 뒤이어 남유다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탐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것이 본문 1-2절에서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신랑이 행음하는 신부에게서 얼굴을 돌리듯, 유다의 배역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얼굴을 돌리셨다는 거죠.
그래서 3절에서는 더 이상 그들에게 단비도, 또 늦은 비의 은총도 내려주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이 창녀가 된 자신들의 수치를 더 이상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결혼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로가 남편으로서 또 아내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고 맹세하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이후 그 아내가 간음을 일삼는다면, 그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혼증서 뿐입니다. 이혼증서를 받은 신부는 더 이상 이전의 남편의 아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과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그와 똑같다는 지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하나님의 신부로 살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이방신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 백성들의 간음하는 모습이라고 호되게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습을 남 유다 백성들이 보고서 깨달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도 북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똑같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 신상앞에 절하고 있는 모습이죠. 그것을 일컬어 행음하였다고, 영적인 간음을 했다고, 하나님께 호되게 책망받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을 내 좇겠다고, 이혼증서를 줘서, 좇겠다고 하십니다.
본문 8절에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실제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내 좇았습니다. 내좇았다는 의미가 뭡니까? 그 백성들을 앗수르 제국을 들어 완전히 진멸시켰다는 뜻이죠. B.C.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고, 그 민족이 이방 세계에 끌려가 살게 되고, 또 그 땅에는 다른 이방 민족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죠. 민족의 자긍심도, 민족성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혼증서를 줘서 내 쫓았다고 말씀한 것이죠.
그렇다면 그 모습을 바라본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때라도 다시금 하나님의 영적인 신부로서, 잘못된 모습은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아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다 백성들조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전철을 밟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책망이 오늘 본문 1-5절까지 나온 말씀이고, 6-25절까지는 그런 책망과 함께, 그들이 돌이키는 것 같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하나님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은 가증스러움을 나타내고 있음을 책망하십니다. 과연 어떤 가증스러움이겠습니까?
본문 10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이런 온갖 음행을 하면서도, 배신한 자매 유다는, 건성으로 나에게 돌아온 척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에게 이혼증서를 줘서 내 쫓았다면, 앗수르 제국을 들어 그들을 멸망케 했다면, 남유다 백성들이라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들은 돌아오는 척 만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 22절 이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으면 “너희 변절한 자녀들아, 내가 너희의 변절한 마음을 고쳐 줄 터이니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우리가 지금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님만이 주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언덕에서 드리는 이교 제사가 쓸데없고, 산 위에서 드리는 축제의 제사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주 우리의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옛부터 우리 조상이 애써서 얻은 모든 것을, 그 수치스러운 우상이 삼켜 버렸습니다. 우리 조상이 애써 모은 양 떼와 소 떼와 아들과 딸들을 모두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수치를 요로 깔고, 부끄러움을 이불로 덮겠습니다. 우리 조상이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주 우리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서 하나님 품으로 다시금 돌아오는 것 같지만, 진정으로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거죠.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아파하는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고백한 거죠.
그렇기에 오늘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들도 유다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행악과 우상을 더 채우고 있는 모습, 하나님의 언약을 더럽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부로 순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탐욕만 좇는 삶을 살고 있는 겉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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